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웅진지식하우스, 2017.
완독일 : 2020. 4. 19.
최근 밤에 자기 전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이란 팟캐스트를 듣는 습관이 생겼다. 무려 2010년부터 녹음이 시작되어 이미 2017년에 종결된 팟캐스트이지만 독서를 주제로 한 팟캐스트이다보니 꽤 세월이 흘렀음에도 매우 흥미롭게 들을 수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소개한 내용이었다.
김영하 작가는 책의 첫 부분을 읽으며 뛰어난 작가는 초입부에 소설 전체의 복선을 잘 배치하는데 이 소설도 그러하다고 했다. 팟캐스트에서 김영하씨가 읽어준 소설의 첫 대목도 매력적이었고,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천재 작가의 작품이란 소개에 끌려 다음 날 바로 책을 주문하여 읽어보았다.
400페이지 정도 되는 두께였지만 일주일 간 틈틈이 읽었더니 모두 완독할 수 있었다. 중간중간 주인공의 심리묘사에서 난해한 대목이 있었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금각'이 상징하는 바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소설 내용을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하고자 애쓰는 청년의 성장소설'이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나에게 자주 금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금각(금각사)은 이 소설 속에서 아버지의 현신이며 도덕과 미의 화신이다. 정신분석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초자아(superego)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범생 친구인 쓰루카와도 역시 금각-아버지-초자아의 영역에 속하는 인물이다.
한편, 심한 안짱다리인 가시와기라는 친구는 세속의 화신, 동시에 악의 화신이다. 정신분석적인 관점에서는 이드(id)에 해당할 것이다. 마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하이드씨 같은 존재로 주인공 내면 깊은 곳 본능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그는 남녀 간의 자유로운 섹스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주인공(미조구치)은 두말할 나위 없이 자아(ego)에 해당하며 초자아와 이드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이다. 두 명의 친구, 쓰루카와와 가시와기는 실은 주인공의 내면, 혹은 분신과도 같은 존재인데, 주인공이 가시와기와 친해진 후 쓰루가와가 죽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세속(가시와기)을 알게 된 후 어린 시절 동경하던 나(쓰루가와)는 죽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대부분의 20대 초반 청년들이 그러하듯 섹스에 대한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그가 동정을 벗어나는 과정은 순탄치 않은데, 일차적으는 말더듬이라는 특성에서 비롯된 낮은 자존감과, 부족한 사회성이 걸림돌이 되지만, 더욱 근본적인 것은 어려서 잠결에 목격한 어머니의 불륜이다. 그리고 주인공의 트라우마를 더욱 깊고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부친이 그 장면을 함께 목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뒤에 잠들어 있던 아버지가 큰 손으로 아들의 눈을 가려 보호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 손바닥의 기억은 살아 있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 손바닥. 등 뒤에서 넘어와 내가 보고 있던 지옥을 순식간에 눈을 뒤덮어 가려버린 손바닥. 다른 세계의 손바닥. 사랑인지 비애인지 굴욕 때문인지는 모르나, 내가 접하고 있던 끔찍한 세계를 순식간에 중단시키고 어둠 속에 묻어버렸던 손바닥."
무성적이며 성인과도 같은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육감적이며 세속적인 인물료 묘사된다.
"도회지의 여자라면 짙은 화장을 해도 괜찮을 나이였다. 일부러 보기 흉하게 하고 있는 듯한 어머니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웅덩이의 물처럼 육감을 남기고 있는 것을 민감하게 느낀 나는 그것을 증오했다.", "어머니는 아름다운 금각과는 태어날 때부터 무연한 인종이었지만, 그 대신에 내가 모르는 현실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아들이 부유한 금각사의 주지가 되는 것은 어머니의 큰 바람이었다.
가시와기로 상징되는 주인공의 이드와 금각으로 상징되는 주인공의 초자아가 계속 갈등하며 대립하는 구도가 소설을 이끌어 간다. 주인공은 가시와기의 추동으로 이성과의 성경험을 앞둘 때마다 아버지의 상징과도 같은 금각의 이미지가 떠올라 번번히 섹스를 포기하고 만다. 아마 주인공은 이성과의 섹스를 앞둘 때마다 원초경(어머니의 정사장면)을 다시 떠올릴 수 밖에 없었고, 어머니를 향한 욕망에 대한 죄책감(오이디푸스 컴플렉스)으로 고통받다가 결국은 금각(아버지) 앞에 돌아와 사죄하고, 자신의 성적 욕망을 미적 가치로 승화시키며 충동을 잠재우는 패턴을 반복한다.
그렇게 불안정한 방황 속에서 삶의 목표가 되는 것은 금각사의 주지가 되는 것이다. 금각사의 주지가 되면 아버지의 상징과도 같은 금각을 소유함과 동시에, 어머니의 바람인 세속적 권력까지도 거머쥐게 되는 것이다. 성적인 욕망을 종교에 귀의함으로써 승화하겠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주지의 타락을 목격하여 주지에게 미움을 받으면서, 금각사의 주지가 되겠다는 목표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더 이상 내면적인 갈등을 조화시킬 방법을 찾지 못한 주인공은 애증의 대상인 금각을 태워 없애기로 결심한다.
방화를 결심한 주인공은 유곽 여성을 통해 동정을 벗어나지만, 이것은 그에게 만족스럽지 않았다. 아마 무의식 속에 있는 어머니에 대한 욕망과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벗어나지 않는 한 그에게 행복한 섹스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으리라.
내면 속의 갈등과 화해하는데 실패한 주인공은 금각에 방화하고 그 불길 속에서 자결하고자 하였지만, 화재 속에서 금각 속으로 진입하지 못하자 현장을 탈출한다. 결국 주인공은 폭력적인 방화(acting out)를 통해 자신의 갈등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삶에 대한 의지를 피력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나는 담배를 피웠다. 일을 하나 끝내고 담배를 한 모금 피우는 사람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이, 살아야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 소설은 1950년 7월 실제로 있었던 금각사 방화사건을 모티브로 씌어졌다. 방화범은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스님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말더듬이였고, 방화 당시 금각사의 도제로 21세였다. 그는 조현병 증상이 있었으며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다가 6년 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읽으며 문장과 주인공의 심리가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만, 소설의 큰 흐름을 파악하는데 별 지장은 없었다. 뛰어난 묘사들과 탄탄한 플롯 구성이 인상적이었는데, 이 천재적인 작가가 나중에 자위대 부활을 외치며 할복했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기도 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작가의 자기 파괴적인 죽음이 그의 대표작인 금각사의 결말에 암시되어 있는 것 같아 좀 씁쓸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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