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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안똔 빠블로비치 체호프) 처음 체호프의 단편집을 읽었을 때는 왜 그가 단편소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오헨리처럼 멋진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피츠제럴드처럼 로맨틱하지도 않았다. 뭔가 어두침침하고 스산한 분위기의 글도 많았고,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 같지도 않은데 슬그머니 끝나버리는 작품들도 많아서 "뭐야. 이거. 이대로 끝난 건가?" 하며 어안이 벙벙할 때도 있었다. 다만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라는 작품만큼은 그 어정쩡한 마무리(?)가 무척이나 깊고 큰 여운을 남겨서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읽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구로프라는 바람둥이 남자가 얄타라는 해변 휴양지에서 젊은 부인과 사랑을 나눈다. 몇 주간 연인 관계로 지내다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고 남자는 그 여자를 쉽게 잊을 거라 생각한다.. 2026. 8. 22.
타조의 비상(飛上) 내가 D 정신병원에 정신과 전문의로 근무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3개월이 지났다. 원래 요양원이던 곳이 정신병원으로 인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환자들의 증상이 여느 병원의 환자들 보다 심한 편이었다. 요양원으로 운영되는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정신과 촉탁의가 외부에서 방문하여 진료를 하긴 했지만, 진료 시간은 짧은데 수백 명의 환자를 처방하다 보니 개개인에 맞게 적절한 치료가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입원한지 10년이 넘고 증상이 심각한데도 여전히 부족한 약물 용량으로 투약 중인 환자들도 꽤 있었다. 물론 그런 정신분열병 환자들에게 고용량의 약물을 투여한다고 해서 증상이 100% 조절되는 것은 아니지만, 열에 한 명이라도 적절한 투약으로 환청과 망상을 벗어날 수 있다면 시간과 .. 2026. 8. 18.
비 오는 날 희진은 사무실의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창밖을 보았다. 아침에 일기예보를 들어둘 걸 그랬다. 화창하던 날씨가 오후 들어 꾸물꾸물해진다 싶더니 퇴근할 시간에 맞추어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창문 위로 한 방울씩 작은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 오늘은 금요일 저녁, 그이는 회사에서 회식이 있다고 했다. 그놈의 회사는 무슨 회식이 그리도 많은지... 회식만 아니면 그이가 차를 가지고 와서 집까지 태워다 줄텐데 말이지... 아직 퇴근 시간까지는 삼십 분 정도 남았으니, 그 새 그칠지도 모르지만.“어이, 미스 윤. 지금 바빠?”사장님은 사무실 문을 열고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사장님은 통통한 체격으로 머리숱이 적고, 코와 볼이 불그레한 탓에 희진은 언제나 사장님을 볼 때마다 피에로 인형을 떠올리곤 했다. .. 2026. 8. 18.
사랑의 흔적 나무에 누가 적어 놓은 낙서를 무심코 지나치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살펴보니 V+A 주위를 하트로 감싸 놓았다. 가까운 초등학교 학생의 낙서인 듯한데… V와 A는 남녀의 이니셜인 것 같고 이 글을 적은 사람은 아마 그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고백하기엔 부끄럽고, 글자 속에서나마 짝사랑을 완성하고 싶어 하는 것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인간의 보편적 심리인가 보다. 누가 언제 적은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궁금해진다. V와 A는 지금쯤 잘 사귀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도 상대의 뒷모습을 먼발치에서 애타게 바라보고만 있을까. 아니 어쩌면 각자의 짝을 만나 행복한 사랑을 나누고 있을지도. 그들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건 나무는 기억하리라. 어느 무더운 여름날,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 2026. 8.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