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31 오랜만에 술주정 아내와 아들이 서울에 놀러 갔다. 그래서 혼자 이틀간 집을 지키게 되었다. 퇴근 후에 집에 오자마자 놀아 달라고 조르는 아이도, 집안일을 도와 달라는 아내도 없으니 오롯이 내 시간이었다. 냉장고에 있던 식은 피자를 데우고 남은 와인을 열었다. 오디오에 재즈 음악을 틀고 잔을 홀짝이다 보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시간을 함께 보낼 사람이 없이 혼자라는 것. 반 병 정도 남아있던 와인을 다 마시고도 아쉬워 위스키를 꺼냈다. 신데렐라의 마법에서 깨어나기 아쉬운 까닭이었다. 지나간 세월들을 생각한다. 그렇게 멀리 걸어온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덧 벌써 20년 혹은 30년 전… 혹은 35년 전… 내 인생의 봄날이 이젠 정말 까마득히 멀리 있음을 실감한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동안 지금도 내.. 2025. 1. 16. 누군가의 오리온 여느 때처럼 새벽 5시 10분 알람에 눈을 떴다. 살아오면서 수 천 번을 반복했지만 아침에 깨어나 이불을 벗어나는 일은 힘들다. 6시 수영 수업에 늦지 않으려면 5시 20분까지는 이불 밖으로 빠져나와야 한다. 이불 안에서 이불 밖까지는 불과 0.5m 거리지만 10분 안에 주파하기가(?) 쉽지 않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이불 밖으로 나와 스마트 폰으로 오늘 날씨를 본다. 영하 9도. 더 나가기 싫어진다. 수영장 주차장이 건물 안에만 있었어도 좋았을 텐데... 주차장에서 수영장 건물까지는 2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영하 9도라니! 밤 사이 긴급 문자가 온 게 있다. "북구에서 실종된 오이온씨를 찾습니다. 나이 26세. 키 180cm..." 며칠에 한 번 정도 받는 긴급문자이고 해서 별로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2024. 1. 12. 사춘기의 시작과 끝에 관하여 어제 갑자기 날씨가 무더워졌다. 마치 7월 같은 더위였다. 저녁엔 배달의 민족으로 비빔냉면을 시켜 먹는 것으로도 모자라 망고빙수까지 주문해 먹었다. 그제야 조금 시원해지는 듯했지만, 자려고 불을 끄고 누우니 열대야처럼 더위에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아 결국 에어컨을 켰다. 덥다고 짜증 내던 아내와 아들은 그제야 곤히 잠에 빠져들었다. 5월에 에어컨이라니... 올여름은 또 얼마나 더울지 걱정이다. 매년 겪는 일이지만 무더운 여름이 오면 지나간 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은 생각나지 않고 어서 추위가 돌아오기만 기다린다. 막상 살을 에는 추위가 찾아오면 여름의 끈적거림과 숨 막히는 열기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 엄혹한 동장군이 물러가기만을 기다리겠지. 언제나 지나고 나서야 과거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은 인간의 숙명인 .. 2023. 5. 22. 피천득의 수필 오랜만에 피천득의 수필집을 꺼내어 몇 편 읽었다. 학생 때 "인연"이란 수필을 접한 후 피천득 작가에게 호감이 생겨 20년 전 이 수필집을 샀었는데, 처음에 사서 읽고는 많이 실망스러웠다. 어떤 점이 실망스러웠는지는 꼬집어 설명하기 어려운데, 그냥 평범한 개인 일기장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아니면 세상에 대한 시각이 나와 많이 달라서였는지도 모른다. 20년간 한 번도 읽어보지 않다가 오늘 문득 다시 꺼내어 몇 편을 읽었는데, 나쁘지 않았다. 문장이 정갈하고 취미가 고고한 사람 같았다. 곳곳에서 나르시시스트적인 면모가 느껴져서 불편한 면이 없진 않았지만, 기대를 내려놓고 읽으니 오히려 장점들이 보였다. 오늘 읽은 글 중엔 "플루트 플레이어"가 좋았다. 주중에 조금 더 읽어야겠다. 2022. 11. 23. 이전 1 2 3 4 ··· 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