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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누군가의 오리온

by 바쁜하루 2024. 1. 12.

여느 때처럼 새벽 5시 10분 알람에 눈을 떴다. 살아오면서 수 천 번을 반복했지만 아침에 깨어나 이불을 벗어나는 일은 힘들다. 6시 수영 수업에 늦지 않으려면 5시 20분까지는 이불 밖으로 빠져나와야 한다. 이불 안에서 이불 밖까지는 불과 0.5m 거리지만 10분 안에 주파하기가(?) 쉽지 않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이불 밖으로 나와 스마트 폰으로 오늘 날씨를 본다. 영하 9도. 더 나가기 싫어진다. 수영장 주차장이 건물 안에만 있었어도 좋았을 텐데... 주차장에서 수영장 건물까지는 2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영하 9도라니!

밤 사이 긴급 문자가 온 게 있다.

"북구에서 실종된 오이온씨를 찾습니다. 나이 26세. 키 180cm..."

며칠에 한 번 정도 받는 긴급문자이고 해서 별로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반쯤 읽다 말고 스팸 지우듯 손가락을 밀어 쓱 지워버렸다. 그보다는 수영장에 늦지 않는게 중요했다. 화장실에 들어가 양치질을 시작했다. 영하 9도... 얼마만의 강추위인가. 그런데 영하 9도 날씨에 실종이라니... 26세라는 나이로 보면 치매는 아니고 아마 지적장애 환자일 것이다. 길도 못 찾을 정도면 중증일 텐데 똥오줌은 스스로 가릴 수 있을까. 키가 180cm면 거구 아닌가. 고집부리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할 때 가족들이 무척 힘들 것이다.

집에서 나와 어두운 새벽길을 운전하면서도 실종 문자는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생각 말고는 특별한 다른 고민이 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이름이었다. 오이온. 이온이라는 이름이 무척 특이하게 느껴졌다. 한글 이름인가? 아니면 한자로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이로울 이, 따뜻할 온일까? 그러다 불현듯 머릿속에 '오리온'이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오이온은 '오리온'을 한자어로 음차 한 것 아닐까? 그 순간 내 마음속에 갓 태어난 이온 군을 품에 안고 기뻐하는 두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웠을까.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아기에게 더없이 예쁘고 특별한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으리라. '오리온'. 기억하기도 쉽고 부르기도 좋다. 하늘의 별자리이기도 하고. 뭔가 서구적이고 세련된 느낌도 든다. 집에서는 친근하게 '오리온'이라고 부르고 출생신고할 때는 한자로 뜻을 넣어서 이온이라고 하자. 그러지 않으면 아이들이 놀릴지도 몰라. '오리온', '오리온', 우리 사랑스러운 아기... 하지만 오늘 새벽 북구에서 실종된 '오리온'... 처음 지적 장애를 진단받던 날 부모님의 심정은 어땠을까. 우리 아이가... 우리 오리온이... 그럴리가... 혼자 길을 못 찾을 정도라면 일반 교육과정을 밟기는 어려웠을 거고, 특수학교를 다니거나 그도 아니면 집에서 그냥 키웠을 테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을까. 지난 26년 간 부모가 겪었을 고통과 좌절, 눈물, 한숨이 어두운 밤공기를 가득 채우며 내 곁에 밀려왔다. 수영장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건물까지 걸어가는 동안 밤하늘을 보았다. 동쪽 하늘에 어머니처럼 곱게 미소 짓는 하현달과 아기 웃음처럼 반짝이는 샛별이 보였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중천에 또 하나 보이는 저 별은 목성일까?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렸을 때 겨울하늘에서 자주 보던 오리온자리도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오리온자리는 작은 곰자리(북두칠성), 카시오페아자리와 함께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별자리들 중에 하나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아는 유명한 별자리이지만, '오리온'씨의 가족에게는 너무나 특별하고 소중한 별자리일 텐데...

수영을 하고, 하루를 바쁘게 지내며 잊고 있다가 저녁에 지인들과 식사를 하며 그 얘기를 했다. 

"아침에 실종 문자에서 오이온이라는 이름을 봤는데, 정말 특이하지 않아요?"하고 내가 묻자 지인들은 

"연예인 중에도 김이온이라고 있는데..."

"혹시 부모님이 물리선생님 아니셨을까요. 양이온, 음이온..."

하며 재미있게 여겼다. 당연히 '오리온'일 거라고 생각했던 건 나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고요한 새벽의 감수성이 나를 마법처럼 센티멘털한 감정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일 테지. 오이온씨는 그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을까? 여전히 궁금하다. 그리고 그 가족들은 그를 정말 '오리온'이라고 부르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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