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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일상에 갇힌 자아

by 바쁜하루 2022. 4. 27.

나도 직장 초년 시절엔 늦게까지 야근하고 주말에 출근해서 일해야 할 때도 많았다. 어느덧 중년에 이르고 보니 최소한 저녁 시간은 식구와 함께 밥 먹고 쉴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내 생활의 대부분은 직장 속에서 이루어진다. 아주 바쁘거나 지독히 힘겨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서 다행이고 남들에게 내 생활의 불만을 얘기하기엔 미안한 입장이지만) 그래도 세월이 흐르면서 쌓이는 불만이란 게 있다. 아마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불만은 있을 것이다. 가령 아내는 박물관 입구에서 표 받는 사람을 무척 부러워하는데, 그라고 불만이 없을 리 없다. 딱딱한 의자를 박물관 측에서 몇 년째 바꾸어주지 않아 치질이 생겼을 수도 있고, 입장권을 찢어주다가 종이에 자주 손을 베인다거나 하는 그런 고유의 직업병이 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 사람 신발을 신어보기 전까진 다른 사람을 무조건 부러워해선 안된다. 

얘기가 잠깐 옆길로 샜는데, 직장생활이라는 것은 사람의 사고방식과 인생관에도 영향을 많이 준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박물관 입구에 앉아 하루를 보내는 사람은 그 작은 매표창구가 그의 우주가 되는 것이고,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서 매일 나사를 조이는 사람은 컨베이어 벨트가 그의 태양, 작은 나사들은 그의 별이 되는 것이다. 사각형의 창고에서 일하면 사각형의 머리를 갖게 되고, 길쭉한 복도에서 일하면 길쭉한 머리를 갖게 된다. 야수들 사이에서 일하다 보면 정글의 사고방식을, 꽃들 사이에서 일하면 꿀벌의 사고방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뭐 말이 그렇다는 것이고, 직장이 사람의 인격을 100% 결정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상당한 영향을 줄 것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주로 아픈 사람들, 그리고 노인들을 접하다 보니 내 생각과 삶을 바라보는 방식도 노인들의 그것을 닮아가고 있지 않은가 싶을 때가 있다. 크게 즐겁지도, 크게 슬프지도 않고, 그저 오늘 하루 살아 있음에 만족하는 태도랄까. 딱히 열정적으로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그렇게 싫거나 꺼려지는 것도 없다. 어쩌면 그냥 나 자신이 나이 들어서, 쉽게 말해 늙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방에서 늑대나 사자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밀림을 걸어가는 사람의 심리 상태와 고요하고 평화로운 보리밭을 걸어가는 사람의 심리상태는 다를 수밖에 없을 텐데, 나는 분명히 후자 쪽에 속하는 것 같다. 약간은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일상. 그러면서 뚜렷한 성취 없이 조금씩 쇠퇴해가는 느낌. 음... 그다지 유쾌한 느낌은 아니다.  

얼마 전, 2007년에서 2012년 사이의 일기장을 꺼내어 보다가 그때는 참 힘들게 살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정말 밀림 속을 포복하듯이 기어 다니며 살았다. 일기장 가득 어두컴컴한 좌절과, 음습한 비관의 기운이 넘쳐흘렀다. 그러다 2013년 이후로는 바빠서 일기를 제대로 적지조차 못하다가, 조금씩 일기를 적기 시작한 건 불과 4, 5년 전부터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글에서 감정은 쏙 빠지고 앙상한 건물 골조 같은 사실(fact)만 적기 시작했다. 한여름에 울창하던 녹색 잎이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메말라 떨어지고 결국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듯이, 내 일기장 속에도 삭막한 겨울이 찾아와 있었다. 언젠가 나의 정서와 가치관에 다시 봄이 찾아와 화려한 꽃과 나비, 새들로 가득한 즐거움이 깃들 날이 있을지,  아니면 이대로 영원히 겨울 같은 삭막함 속에 끝이 날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나의 단조로운 일상이라는 무형(無形)의 틀 때문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의구심이 자꾸 든다. 뭐, 그렇다고 내가 내일 당장 박물관 매표원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를 바꾸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붕어빵 틀 속에 든 붕어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게 되면 언젠가는 붕어빵 틀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니모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끝끝내 어항 밖으로 탈출했듯이 말이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붕어빵이라... 슬쩍 웃음이 나면서도 어쩐지 가슴이 설렌다. 오늘 밤에는, 드넓은 강물 속을 헤엄치는 붕어빵의 꿈을 꾸고 싶다. 

붕어빵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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