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갑자기 날씨가 무더워졌다. 마치 7월 같은 더위였다. 저녁엔 배달의 민족으로 비빔냉면을 시켜 먹는 것으로도 모자라 망고빙수까지 주문해 먹었다. 그제야 조금 시원해지는 듯했지만, 자려고 불을 끄고 누우니 열대야처럼 더위에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아 결국 에어컨을 켰다. 덥다고 짜증 내던 아내와 아들은 그제야 곤히 잠에 빠져들었다. 5월에 에어컨이라니... 올여름은 또 얼마나 더울지 걱정이다. 매년 겪는 일이지만 무더운 여름이 오면 지나간 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은 생각나지 않고 어서 추위가 돌아오기만 기다린다. 막상 살을 에는 추위가 찾아오면 여름의 끈적거림과 숨 막히는 열기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 엄혹한 동장군이 물러가기만을 기다리겠지. 언제나 지나고 나서야 과거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은 인간의 숙명인 것일까.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교 사이에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겪게 되는 시기를 사춘기라고 한다. 사춘기(思春期), 즉 봄을 생각하는 시기란 단어는 참으로 완곡하면서도 핵심을 담은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춘화(春畫)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춘은 성(性)을 뜻하므로 사춘기는 결국 성에 관한 생각을 하는 시기, 즉 이성에 눈 뜨는 시기이다. 흔히들 성인이 되고 나면 질풍노도의 시기인 사춘기도 끝난다고들 하지만, 내 생각에 성인기는 사춘기의 끝이 아니라 연속이자 성숙, 계절로 치자면 여름인 듯하다. 성인이 되면 성적인 에너지는 더 활발해지고 발전해서 개인뿐 아니라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 오히려 사춘기의 끝은 성에 관한 생각을 거의 하지 않게 되는 시기, 혹은 성적인 능력이 감퇴되어 로맨틱한 사랑이 어려워지는 시점이 아닐까 한다. 남성과 여성은 생리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남녀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기는 어렵겠지만, 최소한 중년 말기 혹은 노년기쯤이 그때쯤, 즉 인생의 가을쯤 되는 시기일 것이다. 하지만 건강한 사람들은 노년이 되어서도 성적인 관심과 성생활을 유지해 나가고, 그런 에너지를 바탕으로 사회적 활동도 활발하게 하니 그들에게는 죽는 날까지 인생이 계속 봄일지도 모른다.
계절 얘기를 꺼내게 된 것은 이성에 대한 나의 생각과 태도가 확실히 10여 년 전과는 달라졌음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10대 때는 좋아하는 여성을 사람이 아닌 특별한 존재로 상상했다. 흔히 말하는 여신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이문세의 소녀라는 곡을 들으면서 이성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애틋함에 가슴이 설레었다. 아마도 소녀라는 단어가 갖는 묘한 매력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여성을 더 이상 남성과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지 않고, 같은 인간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은 다양한 사회적 경험을 통해 내가 그만큼 성숙했다는 뜻일 것이다.
한 때 해외여행을 가보기 전까진 외국 어딘가를 가면 거기에 지상낙원이 존재할 것만 같은 상상을 하기도 했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친절하고, 그곳의 날씨는 언제나 쾌적하고 아름답기만 할 거라는 그런 상상. 몇 차례 해외에 다녀오고 나자 외국에 사는 사람들도 똑같은 사람들이고, 좋은 사람들도 있고, 나쁜 사람들도 있고, 사진으로는 너무나 아름답고 낭만적인 장소가 막상 가보면 인산인해 속에 너무 보잘것없어 실망스럽기도 했다. 여성에 대해 갖는 느낌도 비슷하게 변화해 왔다. 많은 이성과 사귀고 가까워지면서 그들도 그냥 사람일 뿐임을 알게 되고, 여성에게 갖는 나의 생각 중 상당 부분이 나의 소망이 투영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항상 따뜻하고, 이해심이 넓고, 언제나 날 사랑해 주는 그런 여성의 이미지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재현하고자 하는 내 바람이었고, 드라마와 영화에서 가장 예쁜 여자 배우들만 그런 역할을 연기하다 보니 이쁜 여자만이 그런 소망을 이루어 줄 거라는 착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겪어보니 그런 소양과 예쁜 외모는 큰 상관관계가 없었고, 또한 그런 자질을 갖춘 여성이 나에게 애정 어린 태도를 보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별개의 문제였던 것이다.
다시 여행 얘기로 돌아가서, 지금 나의 문제는 특별히 가고 싶은 나라가 없다는 점이다. 어딜 가도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할 것 같고, 굳이 그까지 가봐야 결국 이 정도일 거야 하는 생각이 들면서 기대 자체가 크지 않다.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떠나가서 돌아올 때까지 아내와 아들을 챙기는 과정이 그냥 일처럼 느껴진다고 해도 큰 과장은 아닐 것이다. 슬픈 일이다. 더 이상 산타클로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어린이처럼 말이다.
여성에 대해서도 비슷한 기분을 느낀다. 더 이상 이성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는다. 지구상에 더 이상 파라다이스가 존재하지 않음을 알 듯이,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 행복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사춘기 때의 1%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성이라는 것은 끈질겨서, 가끔은 한때 내가 좋아했던 여성상, 혹은 스타일을 가진 여성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먼저 반응한다. 얼굴이 작고, 뒷머리를 올려 묶어서 하얀 목선이 길게 드러난 여성을 보면 심박수가 분당 10회 정도씩 빨라지거나 나도 모르게 시선이 0.5초 정도 더 머물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20대이던 90년대에 한창 유행하던 스타일이 내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 소중하게 생각하던 어떤 이의 정겨운 사투리와 어조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가고, 마음이 그 곁에 한 걸음 다가가 있음을 발견하고 사뭇 놀란다. 내 글씨체 속에는 중학교 1학년 때 좋아하던 여선생님의 필체가 녹아있음도, 나는 알고 있다. 무의식 중에 그녀의 필체를 따라 하고 있음을 30년이 더 지난 지금도 가끔 느낀다. 나의 삶 속에서 만나고 사랑했던 수많은 여인들의 이목구비와 목소리, 말투, 걸음걸이, 뒷모습, 습관, 웃음소리 이런 것들이 마치 모자이크처럼 섞인 채 형체 없는 형체가 되어 내 마음속에 존재한다. 나의 20대와 30대는 그 보이지 않는 여성을 만나기 위한 여행이었고, 그녀를 찾아가던 길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사랑을 하고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물론 이제는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것이고, 줄 수도 없으리란 걸 알지만, 가끔 혼자 밤과 마주하거나 삶과 마주할 때, 술이란 타임머신을 타고 이리저리 과거를 여행할 때, 내가 찾아다니던 마음속의 그녀가 그리워진다. 더 이상 찾지 못할 것을, 그리고 만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립고 보고 싶다.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어떤 모습인지 이미 알고, 느끼고, 함께 숨 쉬고 있는 그런 존재. 내 영혼의 반쪽. 나의 아니마. 그런 존재가 더 이상 외부에 실재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인생이 무척이나 고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융은 자기 안에 존재하는 반대 성(性)의 속성을 발견하고 실현해 나가는 것이 스스로의 인생을 완성하는 길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내 인생의 늦여름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을이 되면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될지도... 계절이 바뀌기 전에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추억들을 하나하나 돌이키며 오랜 유물을 발굴하듯 내 마음속 깊은 곳을 찬찬히 살펴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