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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월간지의 로망과 녹색평론

by 바쁜하루 2020. 6. 27.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는 월간지를 구독하셨다. ‘신동아’를 보시기도 했고 ‘직장인’이란 잡지를 보시기도 했다. 그런 잡지엔 으레 시사만화가 한 편 정도 있곤 했는데 매달 그 만화를 보기 위해 잡지가 오는 날을 기다리곤 했다. 숨은 그림 찾기나 십자말 풀이도 있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대학생이 된 후 뭔가 잡지를 하나 구독하고 싶었는데, 선배들이 보는 ‘말’, ‘길’ 같은 이른바 운동권 잡지는 새내기인 내게 쓴 약처럼 삼키기가 쉽지 않았다. 캠퍼스에서 우연히 만난 외판원의 설득에 넘어가 ‘창작과 비평’을 창간호부터 전집을 대뜸 구입했다가 며칠 만에 후회하고 겨우 환불받은 기억도 있다. 영문잡지인 타임지 구독을 권하는 외판원도 있었는데, 다행히 그 유혹(?)에는 넘어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뭐랄까 대학생도 되고 했으니 세상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는 나름의 의무감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혹은 상아탑, 지성인같은 단어들에 묻어 있는 얄팍한 허영심이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가끔 시사저널을 사서 봤었고, 94년에 한겨레21이 창간된 후에는 한동안 한겨레21을 사서 읽곤 했다. 그 외에는 주간지건 월간지건 별로 읽은 적이 없다.
1년쯤 전부터 시사인을 정기구독 중이다. 나는 뭐든 끈기가 없어서 요새는 잘 읽지 않는데, 다행히 아내가 주로 읽고 있다. 아내와는 정치 성향이 비슷하여 잡지를 두 권 구독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좋다.
며칠 전 녹색평론의 발행인인 김종철 교수의 부고 기사가 났다. 녹색평론은 시사인을 구독하기 전에 월간지나 계간지를 찾아보던 중 우연히 알게 된 잡지이다. 특이하게도 환경, 기본소득 등 현실정치와는 좀 거리가 있는 내용을 주로 다루는데, 그 주제의 희소성에 비해 마니아층이 있어서 30년째 꾸준히 발간되고 있다. 나날이 지성의 사막화가 진행되는 대한민국에 이런 ‘순수사회’(순수문학에 비견되는 순수 사회과학 영역이 있다면) 잡지가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운데, 그 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발행인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니 앞으로도 과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염려된다.
지금 구독중인 시사인이란 잡지는 여러모로 훌륭하다. 다만 주간지란 특성상 지면이 한정되어 월간지처럼 시나 소설 등은 싣지 않는데, 그런 문화적 갈증도 채워줄 수 있는, 내 취향에 맞는 월간지, 혹은 계간지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말하자면 시사인은 너무 dark하달까? 혹은 dry하달까? 세 가지 미덕인 진, 선, 미 중에 진과 선은 있는데 미가 없다. 어렸을 때 시사만화를 보기 위해 아버지의 월간지가 오는 날을 기다리던 그때의 심정으로, 매달 즐겁게 기다릴 수 있는, 읽다 보면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과 영혼도 따뜻하게 채워지는 그런 잡지를 구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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