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카메라 뽐뿌를 벗어나 보겠다며 열심히 글을 썼던 것이 무색하게 결국은 지르고야 말았다. 사는 것은 낭비가 아니다. 사놓고 활용을 하지 않는 것이 낭비다... 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가급적 오랫동안 재미있게 가지고 노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직장과 집을 오가는 생활 속에서 찍을 수 있는 소재는 한정되어 있음을 곧 깨달았다.
오늘 마침 혼자서 잠시 산책할 기회가 생겨서 카메라를 챙겨 메고 나섰다. 구름이 좀 낀 날씨였으나 날이 몹시 무더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테이크 아웃했다. 기대보다 맛이 괜찮아 기분이 좋아졌다.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하듯 목 안쪽으로 시원함을 쭉쭉 채워 넣으면서 이리저리 거닐었다. 무엇을 찍어볼까... 흐르는 땀을 닦으며 한가한 사냥꾼처럼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뭔가 마음을 사로잡는 풍경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러다 뭐든 눈에 띄면 찍어보자 싶어 조금만 시선이 가면 마구 눌러보았는데, 카메라 조작도 익숙지 않고, 단렌즈 사용도 처음이라 발 줌 하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그렇게 오후에 찍은 사진 몇 점들.





찍으면서 든 생각은 사진 속에 의인화할 수 있는 대상이 없으면 무척 공허하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사진의 경우 흑백의 대조를 살리고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담으려고 찍었는데 사진은 깔끔하게 나왔으나 그냥 거기까지인 것 같다. 약간 몬드리안적인 느낌이 나지만 so what? 아무 스토리가 없다. 두 번째 사진의 경우 의인화의 대상은(이는 사람마다 느낌이 다를테지만) 우선 좌우의 벽이다. 근위병처럼 좌우에 서서 나를 맞이하는 느낌이 든다. 비스듬한 전봇대, 주홍빛 꽃은 이 동네에 사는 늙은 할아버지, 중학생 소녀의 이미지를 닮았다. 암튼 이런 식으로 사물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기에 두 번째 사진은 외롭지 않다. 하지만 다소 산만하고 구도가 평범하며 주제가 모호하다. 세 번째 사진은 평범한 정물 사진인데 아웃포커싱 테스트도 해볼 겸 찍어보았다. 광고에서는 3B라고 해서 baby, beauty, beast는 어지간하면 실패하는 법이 없다고 한다. 네 번째 사진은 골목길 안에 있는 식당 입구를 찍은 것이다. 하얀 천과 낡은 전등과 액자에 넣은 현판, 나무기둥 같은 각각의 사물들이 모두 예뻤다. 첫 번째 사진처럼 그냥 '예쁘네' 정도로 끝날 수도 있고, 보기에 따라서는 전등에게 약간의 친밀감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전등이 마치 얼굴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나만 그런가? 이것은 픽사 영화를 많이 본 탓?) 마지막 사진은 역시 아웃포커싱을 연습할 겸(비싼 돈 들여 카메라를 산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 아니던가?) 사람들 블로그에 종종 올라오는 구도를 흉내 내어 찍어보았다. 구도 상 안경은 그 자리에 없었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책 좋아하는 이들에게 책 사진은 인물 사진과 비슷하다. 책은 항상 나에게 말을 걸기 때문이다. 내가 대화하기 싫으면 언제든 중단할 수도 있고, 사진 모델로서도 훌륭하니 책은 정말 좋은 친구다.
오늘 재미있게 가지고 논 덕택에 카메라 구입비의 1/100 정도는 즐긴 것 같다. 앞으로 99번 더 즐기면 본전은 뽑는 거다. ㅎㅎ 문제는 오늘처럼 혼자 유유자적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없다는 것... 이럴 때는 아직 싱글인 친구들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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