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mas Mann. 1903. Tonio Croiger. [토니오 크뢰거]. 강두식 역. 문예출판사. 2006.
완독일: 2020. 6. 19.
부정청탁금지법으로 유명한 김영란 전 대법관께서 청소년기에 가장 감명 깊게 읽으신 책이라는 얘기를 듣고 흥미가 생겨 읽어보았다(https://www.google.com/amp/s/m.biz.chosun.com/news/article.amp.html%3Fcontid%3D2014112603305).
토니오 크뢰거는 북부 독일의 한 도시에 살고 있는 소년이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독일인이지만 어머니는 라틴계열의 여인으로 토니오 본인은 외탁을 해서 피부색이 짙으며 남국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의 예술적인 기질을 이어받아 시와 문학을 사랑한다. 하지만 주위의 전형적인 독일 친구들과는 외모와 취향, 심지어는 이름조차도 눈에 띄게 다른 까닭에(토니오란 이름은 독일에서 매우 이국적인 이름인 모양) 토니오는 ‘은따(은근한 왕따)’의 삶을 살면서 자신의 존재에 불만을 갖는다. 그 후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가세가 기울고 어머니는 남쪽의 예술가와 곧 재혼하면서 토니오는 집을 떠나 독립한다. 그 후 남쪽 나라(아마도 이탈리아)를 터전 삼아 살면서 시인으로서 크게 성공하지만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토니오는 자신이 예술의 영역에 속한 사람이지만 예술은 현실을 동경하고 모방할 뿐 결코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하여 좌절하나, 그의 지인인 슬라브족 여성 화가 리자베타에게서 “당신은 길을 잘못 든 속인일 뿐”이라는, 다시 말해 예술의 영역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는다. (토마스 만은 예술과 세속이란 이분법적 구분을 라틴(=예술)과 게르만(=세속)이라는 민족적 특성과 연결 짓는 특이한 시각을 보인다. 따라서 리자베타의 말은 “당신은 라틴인이 아닌 게르만인”이라는 의미로도 들린다). 얼마 후 토니오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자신의 고향인 북부 독일 마을과 덴마크, 스웨덴의 마을들을 여행하며 그곳이 자신의 영혼의 고향임을 자각하지만, 자신의 외모 때문에 사기꾼으로 오해받아 경찰의 심문을 당하기도 하면서 이방인의 서러움도 다시금 느낀다. 스웨덴의 어느 마을에서 어린 시절 자신의 우상이던 친구 한스와, 자신이 짝사랑하던 소녀 잉겔하르트가 서로 연인이 된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고는 차마 아는 척하지 못한 채 자기 방으로 돌아와 회한과 향수에 젖어 흐느껴 운다. 하지만 토니오는 그렇게 그 두 사람을 동경하고 질투하면서도 자신이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감정을 소중하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토니오는 리자베타에게 쓰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소설은 끝을 맺는다.
“하지만 저의 정말로 깊고 가장 은밀한 짝사랑은 금발 머리, 푸른 눈을 가진, 맑고 씩씩한,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평범한 사람들에게 바쳐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랑을 꾸짖지는 마세요, 리자베타. 그것은 선량하고 진실 가득한 사랑입니다. 그 속에는 그리움이며 우울한 선망 그리고 얼마 안 되지만 멸시하는 마음과 아주 청순한 행복감이 섞여 있습니다.”
이 소설은 토마스 만의 경험이 짙게 투영된 자전적 소설이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곳도 소설 속에서와 같이 독일 동해를 바라보는 항구도시인 뤼벡이었고, 부친은 독일계로 소설 속에서처럼 영사는 아니었으나 시의원(senator)이자 부유한 곡물상이었다. 모친은 독일계와 포르투갈계 혈통이 섞인 브라질 출신 독일인으로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만이 16세 때에 부친이 돌아가시고 집안이 몰락하여 그는 뮌헨으로 옮겨가서 자랐다. 아마도 모계의 포르투갈 혈통과 그로 인한 만의 외모적 특성이 그의 자아 정체성 형성과정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듯하고, 이 소설을 발간한 28세 무렵까지도 그로 인한 내적 갈등이 깊었던 것 같다. 소설은 결국 자신이 라틴의 외모를 가진 슬픈 게르만인임을 인정하면서 마무리된다.
소설 속 토니오의 방황하는 모습에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격투기선수 추성훈이었다. 그가 한쪽 어깨엔 태극기가, 다른 쪽 어깨엔 일장기가 새겨진 유도복을 입고 경기를 마친 후, 관객을 향해 양쪽 어깨를 보란 듯이, 한이 맺힌 사람이 가슴을 치듯 번갈아가며 두드리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그 짧은 동작 속에,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한국인의 깊은 비애가 절절히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에도 수많은 토니오 크뢰거들이 초등학교 교실에, 중고등학교 교실에, 그리고 사회와 직장에 살고 있겠지.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그들을 상처 없이 보듬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짝반짝 빛나는(에쿠니 가오리) (0) | 2020.06.28 |
---|---|
첫사랑(이반 투르게네프) (0) | 2020.06.20 |
어둠의 속(조셉 콘래드) (0) | 2020.06.17 |
슬픔이여 안녕(프랑소와즈 사강) (0) | 2020.06.15 |
성(카프카) (0) | 2020.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