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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반짝반짝 빛나는(에쿠니 가오리)

by 바쁜하루 2020. 6. 28.

 

Kaori Ekuni. 1991. Kirakira hikaru. [반짝반짝 빛나는]. 김난주 역. 소담출판사. 2001.

완독일: 2020. 6. 29.

아내가 결혼 전 샀던 책인데 책장에 꽂혀 있는 걸 무심코 꺼내 읽었다. 에쿠니 가오리는 냉정과 열정 사이로 유명한 일본 여류작가인데, 나는 이번에 처음 접하게 되었다.
소설은 동화적인 분위기의 반주에 맞춰 리얼리즘의 감성을 노래하다가 다시 동화적인 반주가 이어지는 패턴이다. 동성애자인 남자와 조울증인 여자가 결혼한다. 결혼의 조건은 서로의 애인을 허락하는 것이다. 남편은 결혼 전부터 오래 사귀어 온 애인(물론 남자다)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여자는 분노 폭발과 우울 상태를 반복적으로 오간다. 이런 동화의 반주 위에 양가 부모님의 개입(그래도 부부가 애는 있어야 하지 않겠니)이라는 리얼리즘이 때론 격렬하고, 때론 서글픈 멜로디와 화음을 넣는다. 남편은 부인에게 이성으로서의 애정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제공하고, 부인은 차츰 남편을 남성이 아닌 가족으로(마치 친오빠처럼) 받아들이게 되며, 결국은 남편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기에 그의 애인마저도 한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역시 이것은 다시 동화적인 반주다. 작가가 그 위에서 연주하는 건 행복의 해피엔딩이지만 내 귀에 들리는 건 여전히 슬픔의 마이너 코드다.
비현실적으로 순수하고 선한 사람들만 등장하는 투명한 공간 속에 현실의 검은 고민을 한 방울 섞어서 찬란한 무지개 빛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솜씨는 대단하다. 뭐, 그렇지만 이런 쪽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
최근 몇 년간 국내에도 동성애 관련 소설들의 붐이 일었다. 나는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아 단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동성애에 대한 무의식적인 혐오나 불편함이 아니었나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인 동성애 커플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이 나름의 수확일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아름다운 문장 몇 줄 인용.

주택가에 사람들의 왕래는 없고, 봄날의 밤이 따뜻하고 푸근하여, 양갱 같다, 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도너츠를 입에다 꾸역꾸역 집어넣는다. 엷은 커피는 뜨겁고, 건포도는 부드럽고 달콤하다. 기름과 설탕 맛이 나, 나는 또 울고 싶어 졌다.

문득 뜨거운 커피 한 잔과 달콤한 디저트가 먹고 싶다. 우울할 땐 역시 단 게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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