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z Kafka. 1926. Das schloss. [성]. 김정진 역. 동서문화사. 2009.
완독일: 2020. 6. 13.
리디북스 전자책으로 1500페이지에 달하는 인간의 굴레를 읽고 나서 '조금 머리를 식힐 겸' 600페이지 정도 되는 성을 읽기로 했다. 인간의 굴레를 열흘 정도 걸려 읽었으니, 절반 분량도 안되는 성은 3, 4일이면 읽을 수 있을 줄 알았으나... 완전한 오산이었다. 대략 12일 정도 걸렸는데, 페이지가 적은 만큼 실제 책을 읽는데 소요된 시간은 인간의 굴레보다 짧았겠지만, 문장의 밀도가 마치 아마존 밀림처럼 높아서(읽어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한 쪽 한 쪽 헤치고 나가기가 정말 힘겨웠다. 밀림이란 표현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늪처럼 끝없이 수렁으로 빠져드는 느낌, 혹은 안개가 자욱한 숲 속에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을 끝없이 헤메는 느낌... 주인공 K의 고독감과 좌절감, 무기력감은 스토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카프카 특유의 그 문장 속에서 느껴졌다.
늦은 밤, 측량기사인 K가 눈과 안개와 어둠에 둘러쌓인 어느 마을에 도착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K는 성의 백작의 부름을 받고 왔으나 마을 사람들에게 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었고, 이 때문에 마을사람로부터 마치 불가촉천민과도 같은 대접을 받는다. 이에 K는 줄곧 성으로 찾아가 본인의 방문이 성의 요청으로 시작된 것임을, 따라서 본인이 존중받아야 할 존재임을 증명하고자 하였으나 성으로 가고자 하는 시도는 번번히 좌절된다. 마을은 성의 영지에 속하며 마을 사람들은 성의 관리들에게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관료제의 가장 아래층부터 하나씩 접촉하여 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이 과정은 K를 포함하여 계급의 밑바닥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너무나 더디고 힘들다. K는 사회(성과 마을)의 기존 체제에 순응하고 자신의 정체성(측량기사)을 포기할 것을 강요받지만, K는 자신의 정당성과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며 체제에 저항한다. 그 과정에서 프리다, 바르나바스 집안 사람들(바르나바스, 올가, 아말리아), 조수들(아르투르, 예레미아스), 교정관 여주인, 페피 등의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며, 이들은 다양한 관점에서 자신들의 삶과 생각을 표현한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마법적인 분위기지만, 결코 상큼발랄하지 않다. 회색빛 먹구름과 안개에 휩싸인 어둡고 추운 눈 덮인 마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감옥에 갇힌 것 같은 무망감(無望感, hopelessness), 그리고 놀라울 만큼 논리적이고 우원증(迂遠症, circumstantiality)적인 문체로 그려내는 체계적인 망상들! 정말이지 등장인물들이 연이어 늘어놓는 궤변과 망상적 생각들을 듣고 있다보면 언어에 갇혀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설은 작가의 사망으로 인해 미완인 상태로 불현듯 끝난다. 작품 해설 부분을 보니 카프카는 다음과 같은 결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K가 온 힘을 다해 부딪쳐 죽은 직후 성 당국으로부터, K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마을에 살며 일하는 것은 허가한다는 취지의 연락이 도착한다.'
카프카 특유의 독특한 분위기와 문체, 그리고 소설이 미완으로 끝난 까닭에 이 작품의 주제와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개인적으로 카프카의 소설이라곤 이 소설과 '변신' 밖에 읽어 보지 않은 까닭에 작품평을 하기가 무척 조심스럽지만, 나는 이 소설의 키워드를 '인간성(humanness)의 상실과 고립'이라고 하고 싶다. 소설 속에서 각 개인들은 서로 간에 불신의 장벽을 쌓은 채 그들의 행복을 결정할 권한을 쥐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성’에 다가가기 위해 끊임없이 고군분투한다. 신사관에 머무르는 비서들은 칸막이쳐진 방에 홀로 갇혀 서류와 씨름하면서 민원인을 한 인간으로 바라보게 될까 두려워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다. 어쩌면 ‘성’은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관념적인 무언가이며, 사람들을 고립으로 내모는 현대사회에 대한 은유인지도 모른다.
소설을 읽다보면 작품 초반에 비인간적인 존재라고 느껴졌던 여러 사람들(조수들(예레미아스), 관료들(뷔르겔), 바르나바스, 아말리아, 페피 등)이 결국은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고통을 느끼며, 고뇌하는 사람들임을 차츰 알게 된다. 비록 작가가 말한 결말에서 K는 성의 결정이 도착하기 전에 삶을 마감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들을 바라보는 독자들의 시선이 변화하는 것, 그리고 K의 인간성 회복을 위한 용기있는 도전에 대해 독자들이 공감하는 것 아닐까?
카프카는 준 국가기관인 '노동자 상해보험회사'라는 곳에서 10년 이상 일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서류로만 취급되는 많은 사람들을 접하며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회 관습과 시스템 속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상황들을 '그 존재조차 부정 당하는' K를 통해 풍자적으로 꼬집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인간의 소외'를 강요하는 사회 시스템을 묘사하기 위해 그토록 질식할 것 같은 문장과 대화들을 창조해 낸 작가의 노력과 고뇌를 생각하면 카프카는 참으로 위대한 작가가 아닌가 싶지만, 누군가 이 작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라고 권한다면 '음... 그건... 다음 기회에...'라며 미루고 싶다.
누구건 이 작품 속으로 뛰어들기 전에는 반드시 체조를 하고 심호흡을 10번 이상 한 후에 깊은 숨을 끝까지 들이마시고 첫 장을 펼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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