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군중심리(귀스타브 르 봉)

by 바쁜하루 2020. 5. 9.

귀스타브 르 봉. “군중심리”. 문예출판사. 2013.
완독일: 2020. 5. 9.

저자인 르 봉은 프랑스인으로 1841년생이다. 20대 시절엔 의사로 지냈고, 30대에는 탐험가로, 40대에는 고고학자로 지냈다. 50대에는 이 책을 비롯한 여러 권의 사회심리학 서적을 출간했고, 60대 이후에는 물리학 관련 연구를 했으며, 88세에 1등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고 90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여러 모로 팔방미인이었던 그가 이 책을 펴낸 것은 54세 때인 1895년이었다. 

프랑스혁명 이후 100여년 동안 프랑스 사회는 공화정과 전제정치를 여러 차례 오가는 유례없는 격변기를 겪었다. 르 봉은 그 시기의 역사적 자료들과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날카로운 직관과 분석으로 '군중'의 특성에 대해 설파한다. 몇몇 사례만을 토대로 본인의 생각이 객관적 진리인 것처럼 단언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곳곳에 느껴져 다소 불편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결국은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군중은 이성에 설득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르 봉에 의하면 군중을 움직이는 힘은 '감정'이다.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이성이나 논리가 아닌 '이미지', '환상', 지도자의 '위엄'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 '위엄있는 지도자'가 자신의 '신념'을 '이미지나 환상'의 형태로 '확언'하고, '반복'하다 보면 그것은 여론화되어 군중 전체에 '감염'되게 된다. "군중의 여론과 신념은 감염으로 전파되는 것이지 이성적 추론으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에게 끌리는 사람들의 심리를 르 봉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군중의 영혼을 지배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 노예 상태에 대한 욕구다. 그들은 복종하고 싶은 욕구에 잔뜩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자기가 그들의 지도자라고 공언하는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복종한다." 

평소 나는 정치는 종교보다는 과학에 가까운 분야라고 생각해 왔으나 르 봉은 이 부분에 대한 내 생각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군중은 당장 자신을 열광시키는 정치적 신조나 승리를 거둔 지도자에게 무의식적으로 신비한 힘을 부여한다. 사람이 어떤 신을 섬길 때만 종교적인 것은 아니다. 정신적 능력을 모조리 동원, 열의를 다하고 자기 뜻을 굽혀가며 자기 생각과 행동의 목표이자 안내자가 되는 어떤 사상이나 인물에 봉사하는 것 역시 종교적이다."

최근 문 대통령의 지지율이 70%를 넘었다. 아마 코로나 대응과정에서 보여준 지도력과 단호함이 돋보였기 때문이리라. 르 봉은 이렇게 말한다. "군중은 힘 있는 사람은 존경하고 순종하지만, 그들이 볼 때 무능함의 한 형태로밖에 안 보이는 어진 사람의 행동에는 그다지 감명받지 않는다." 문 대통령의 경우는 역으로 어진 사람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힘 있는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 것, 말하자면 유약한 선비의 이미지가 엄격한 군사령관 같은 이미지로 바뀐 것이 지지율 상승에 큰 힘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선거에서 지기만 하면 이름을 바꾸는 우리나라 정당들의 관행도 이미 예견하고 있는데, "정치적 격변이나 신념의 변화가 이뤄지고 난 뒤에 군중이 어떤 단어가 환기하는 이미지에 깊은 반감을 품게 되었을 때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실 자체에는 일체 손대지 말고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만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새누리당이 사라지고 자유한국당이, 자유한국당은 미래통합당이...... 

19세기 말에 씌어진 책이지만, 내용은 조금도 진부하지 않았다. 그동안 정치판의 꼼수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름 이런 통찰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왔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군중심리가 어차피 인간의 본성이라면 무시하기 보다는 잘 파악하고 이용하는 것이 현명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 SNS에 넘쳐나는 악성 댓글들, 그리고 n번방 사건도 바로 이런 군중심리의 반영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인터넷미디어정책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이 책을 꼭 읽어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의 굴레(서머셋 모옴)  (0) 2020.06.01
페스트(알베르 카뮈)  (0) 2020.05.14
인간의 대지(생텍쥐페리)  (0) 2020.05.08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0) 2020.05.08
숨(테드 창)  (0) 2020.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