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슬픔이여 안녕(프랑소와즈 사강)

by 바쁜하루 2020. 6. 15.

 

Francoise Sagan. 1954. Bonjour tristesse. [슬픔이여 안녕]. 정인택 역. 소담출판사. 2002. 

완독일: 2020. 6. 15. 

아내가 책장이 비좁아 새로 산 책들을 꽂을 자리가 없으니 안 읽는 책들은 좀 버리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버릴만한 책이 뭐 있나 서재를 둘러보다가 구입 후 한 번도 읽지 않고 꽂혀 있는 책들이 꽤 많음을 발견했다. 이 책도 그중 한 권이다. 언제 구입했는지도 모르겠고, 왜 구입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용도 전혀 생각이 안 나서, 어쨌거나 버리기 전에 한 번은 읽어봐야지 싶어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다. 

쎄실은 17세 여성으로 15년 째 홀아비인 40세의 바람둥이 아빠와 함께 살고 있다. 소설은 그들이 해변의 별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동안 벌어지는 일들로, 아빠가 안느라는 정숙하고 매력적인 40대 여성과 결혼을 약속하면서 쎄실과 안느가 겪는 기묘한 갈등관계가 중심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쎄실은 아직 고등학생이지만 아빠와 함께 술 마시고, 함께 담배 피우며, 자신의 연애 상대에 대해 자유롭게 얘기하는 그야말로 개방적인 소녀인 까닭이다. 이 세 명 외에 쎄실이 해변에서 사귀어 애인으로 발전하는 시릴르라는 청년과 아빠의 전 애인인 엘자가 소설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프랑스 여성 작가인 사강이 소르본느 대학 재학 중인 18세 때 쓴 데뷔작으로 사람들의 심리에 대한 관찰이 섬세하고, 미국 헐리웃 영화 같은 스피디한 전개와 낭만적인 묘사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1950년 대 프랑스 인들의 연애관, 결혼관이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당대 프랑스인들의 보편적인 생각인지, 아니면 작가 사강의 개인적인 취향인지 알 수 없지만 무척 파격적인 대목이 많다. 사강은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들을 보면 꽤 미인인데, 마약 중독과 도박 중독으로 여러 번 구설수에 올랐다고 하며, 마약 사용에 대해 본인 입장을 밝히면서 김영하의 유명한 소설 제목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표현을 처음 언급한 장본인이라고 한다.(https://namu.wiki/w/%ED%94%84%EB%9E%91%EC%88%98%EC%95%84%EC%A6%88%20%EC%82%AC%EA%B0%95)

아마 프로이트가 읽었다면 틀림없이 '일렉트라 콤플렉스'의 생생한 증언이라고 했을 법한 내용이지만, 그렇게 학술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는 1도 없는 소설이다. 10대 소녀 특유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거침없이 적어나간 소설이라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사랑과 성에 처음 눈뜨면서 성인이 되어가는 인생의 파라다이스 같은 시기, 4-50대의 시들어버린 기억력과 메마른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눈부시게 섬세한 젊음의 감수성이 담긴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한 번은 읽어볼 만한, 하지만 두 번은 읽어볼 필요 없는 소설이란 생각에 이 책은 이번 기회에 책장에서 떠나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책의 제일 마지막 대목만큼은 여기 메모해 두고 싶다. 

다만 내가 침대 속에 있을 때,
자동차 소리만 들리는 파리의 새벽녘
나의 기억이 이따금 나를 배신한다.
다시 여름이 다가온다. 
그 추억과 더불어. 
안느, 안느!
나는 이 이름을 낮은 목소리로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되풀이한다. 
그러자 무엇인가 내 마음속에 솟아나고,
나는 그것을 눈 감은 채 그 이름으로 맞이한다. 
Bonjour, tristesse! (안녕, 슬픔아!)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니오 크뢰거(토마스 만)  (0) 2020.06.19
어둠의 속(조셉 콘래드)  (0) 2020.06.17
성(카프카)  (0) 2020.06.13
인간의 굴레(서머셋 모옴)  (0) 2020.06.01
페스트(알베르 카뮈)  (0) 2020.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