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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무진기행(김승옥)

by 바쁜하루 2020. 10. 5.

김승옥. 1995. 무진기행. 문학동네. 

'무진기행' 외에 '생명연습', '서울 1964년 겨울', '서울의 달빛 0장' 등 김승옥의 대표작들을 담고 있는 단편소설집이다. 문학동네에서 김승옥 소설전집을 내면서 단편소설만을 모아 1권을 발간하고, 이어서 중편, 장편 등을 시리즈로 내었다. 이 책이 발간된 것은 95년이지만 그의 대부분의 단편소설들은 60년대에 발표되었거나 혹은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의 소설집을 읽으면서 제일 인상깊었던 것은 바로 그 60년대, 그 시절의 풍경과 사람들이었다. 언뜻 지금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정말 까마득한 옛날 같기도 한, 유교적인 남존여비 사상의 폐습이 당연한 듯 여겨지던 시대, 가정폭력, 성폭력 등이 삶의 한 부분인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던 시대... 너무나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체 아래에 이런 시대적 차이가 문득문득 느껴질 때는, 부드러운 전을 먹다 느닷없이 목에 생선가시가 걸린 것처럼 읽는 행위가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작가도 이를 의식했던지 서문에서 자신의 소설은 60년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한낱 지독한 염세주의자의 기괴한 독백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60년대라면 지금은 70대인 나의 부모님 세대가 10대와 20대를 보냈던 시절, 아마 그분들께는 가장 황금기였을 시절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부모님과 일가 어르신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가운 온돌방에 겨울 내 불도 넣지 못하고 이불 한 겹에 의지하고 있는 주인공, 겨울 한밤중에 카바이트 불빛만 반짝이는 포장마차에서 언 발을 동동 구르며 술을 마시는 주인공들을 볼 때 지금도 굳이 난방비 아끼신다며 겨울에 냉골로 지내는 부모님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약국에서 항생제를 임의로 사고, 화재현장에 불구경을 한다며 사람들이 떼 지어 모여있는 모습에서 내 유년 시절의 경험을 떠올리며 '나도 참 오래된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배경인 60년 대에 성매매, 성폭력 문제가 너무 간과되었다는 점이 불편하긴 했으나, 대부분 작품들이 평범한 서민들의 애환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무척 좋았다. 여러 작품 중 내게는 특히 '차나 한잔'이 인상깊었다. 설사라는 생리현상과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절묘하게 연결시키면서 좌절과 분노의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한 점이 훌륭했다. 

표제작인 무진기행은 두말할 나위없이 수작이다. 무진기행은 예전에 도서관에서 읽었었는데, 어쩐 일인지 요즘 들어 다시 읽고 싶어져 이 책을 구입했던 것이다. 초입부의 무진행 버스 풍경과 반쯤 잠든 주인공의 심리묘사는 다시 읽어봐도 압권이었다. 주인공 희중은 남들 보기에는 번듯한 제약회사 간사이고, 조만간 아내와 장인의 힘으로 전무 승진을 앞두고 있지만, 실은 첫사랑에게 배신당한 후 오직 출세만을 위해 재혼인 아내와 결혼한, 처가의 데릴사위같은 존재이다. 즉 사회적으로는 성공하였으나 내면적으로는 공허하고 피폐한 상태인 주인공. 무진으로 가는 버스 안 풍경은 그가 얼마나 지쳐있는지, 삶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읽다 보면 나도 그 버스 한 구석에 기대어 덜컹거림에 몸을 실은 채 끝없이 졸고 싶은 욕구가 솟아난다.

무진에 도착한 후 주인공은 우연히 인숙이란 음악교사를 알게 되고, 후배인 박의 연모의 대상이자, 동기인 조의 육탐의 대상인 그녀와 하루 만에 친해져서 몸과 마음을 차지하는 데 성공한다. 수컷들 사이의 경쟁에서 당당하게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예정되어 있던 일주일의 휴가기간 동안 그녀와 애인 행세를 하며 신나게 지내보려는 찰나, 서울에서 '회의에 참석해야 하니 긴급하게 상경하라'는 아내의 전보가 도착하고 주인공은 이 행복한 꿈에서 깨어날지 말지 한참을 망설인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이렇게 결심한 후 주인공은 인숙에게 

'(전략)...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저를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지만

'쓰고 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어봤다. 또 한번 읽어봤다. 그리고 찢어버렸다.'

차마 자신도 속이지 못할 거짓말을 그녀에게 할 수 없었고, 희중은 결국 현실 속에 주저앉고 만다. 무진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 주인공은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인숙에 대한 미안함과 동시에 자유의지 없이 살아가는 스스로에 대한 무력함과 비참함이 섞인 감정이었을 것이다. 

왜 이 소설을 요즘 다시 읽고 싶어졌는지 모르겠다. 어딘가 무진같은 시골에 가서 푹 쉬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인숙같은 여인과 만나 풋사랑의 기억이라도 더듬고 싶은 것일까? 

...어쩌면 덜컹이는 시골 버스 한구석 자리에 기대어 낮잠을 곤하게 자고 싶은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