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omain Gary. 1975. Les oiseaux vont mourir au Perou.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김남주 역. 문학동네. 2001.
완독일: 2020. 7. 23.
요즘 즐겁게 듣고 있는 팟캐스트 '작가를 짓다'에서 소개해준 로맹 가리의 소설이다. 러시아 출신 이민자로서 편모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지만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종 도뇌르를 받았고, 외교관으로 재직했으며, 공쿠르 상을 2번이나 수상한 대단한 이력을 가진 작가이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진 시버그라는 미국 여배우와의 결혼인데, 로맹 가리가 48세일 때 무려 24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두 사람 다 배우자가 있었음에도 양측 다 이혼을 한 후에 결혼했다. 이런 화려한 이력에 오히려 약간의 거부감이 느껴졌던 탓인지, 방송을 들은 직후에는 그의 소설을 읽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책의 제목만은 굳기 전의 시멘트에 찍힌 발자국처럼 뇌리에서 계속 지워지지 않아 결국 한참 지난 후에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표제작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비롯하여 16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읽고 난 후 첫인상은 '흠잡을 곳 없이 참 잘 썼다'는 것이다. 그가 섬세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든 문장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나전칠기 공예를 하는 장인의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물고기 비늘처럼 얇은 전복 조각을 조심스레 집어 들어 한 점 한 점 세공해 나가는 모습이 종교의식처럼 경건했다. 로맹 가리가 이 소설을 써나가는 모습도 아마 그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작품들은 각각 개성이 있어서 분위기를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인간성에 대한 환멸'이다. 이는 잔혹한 2차 세계대전을 온몸으로 겪고, 나치의 인종말살 정책을 직접 목도한 불행한 세대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파렴치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어리석은 인간 군상들의 민낯을 작가는 정밀화처럼 세밀하게 묘사한다. 어떤 희망도, 절망도 암시하지 않은 채, 인간은 애초부터 그런 존재임을, 격앙됨 없는 단조로운 어조로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다소 환상적인 분위기의 이야기도 몇 편 있는데, '비둘기 시민', '본능의 기쁨',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같은 작품들이다. 소설이란 장르의 특징을 십분 활용하면서도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블랙 유머를 잃지 않는다. 나는 특히 '비둘기 시민'이 마음에 들었다. 소설 속에서 비둘기는 인종적 약자, 특히 흑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체국 직원의 설명-"우리나라에서는 인종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교육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간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과 함께 소설 뒷부분에서 비둘기가 브롱크스(뉴욕 북부의 흑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가난한 지역) 억양으로 말한다는 점에서 명백해진다. 미국에서 온 주인공의 눈에 흑인은 사람이 아닌 존재로 보였던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흑인이 거기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20년 후 주인공은 집에서 간호사의 돌봄을 받고 있고 주인공은 라쿠센과 자신을 둘 다 비둘기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 따라서 주인공은 정신이 이상해졌거나 더 이상 비둘기와 인간을 차별하지 않게 되었다는 암시가 마지막에 묘사되면서 소설은 익살스럽게 마무리된다. 로맹 가리가 작품을 썼던 1960년대까지도 미국에서는 백인과 흑인이 서로 다른 식당, 다른 화장실, 다른 버스 좌석을 이용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종 차별에 대한 정말 날카로우면서도 유머러스한 풍자가 아닐 수 없다.
위의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그의 작품들을 읽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평소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오 헨리의 소설은 한 편씩 읽을 때마다 인간성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점차 쌓아가게 되는 반면, 로맹 가리의 작품은 그와 정반대로 인간은 차갑고 이기적인 짐승에 불과함을 여실히 깨닫게 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 애정이 가는 것은, 오른쪽 길이건, 왼쪽 길이건 오 헨리와 로맹 가리가 가고자 하는 지점은 결국 같은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결코 아름답지 않다는 점을 두 사람 모두 잘 알았지만, 오 헨리는 행복한 결말을 통해 우리를 위로하고자 한 반면, 로맹 가리는 참혹한 결말을 보여주어 우리를 보다 올바른 방향으로 채찍질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좋은 친구를 소개받은 것처럼 반가운 소설이었다. 그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도 언젠가 꼭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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