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주종을 물으면 언제나 맥주 아니면 와인이라고 대답했다. 소주는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이 없고, 막걸리나 동동주는 마실 때는 괜찮지만 항상 뒤끝이 좋지 않았다. 가끔 양주를 좋아한다는 사람을 만나면 내심 '양주를 왜 좋아할까? 독하기만 하지 별로 맛도 없는데...'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여기서 양주는, 내 짧은 경험 속에서 위스키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내가 경험해 본 위스키래봐야 발렌타인, J&B, 잭다니엘 정도가 다였다.
언제나 양주는, 소주나 맥주에 이미 잔뜩 취한 상태에서 3차로 방문한 곳, 그곳이 나이트가 됐든, 아니면 더 비싼 곳이 됐든 이미 떡이 된 상태에서 마셨고, 항상 내가 아니라 여성을(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마시게 하려고 주문했던 술이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어두컴컴한 조명, 현란한 불빛 속... 취해 쓰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낯선 여성을 향해 쉴 새 없이 뻐꾸기를 날리던, 그런 밤에 마시던 술... 당연히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그냥 '엄청 독하네...' 하는 생각만으로 마시던 술... 가격이 비싸다 보니 내 돈 내고 사 마실 생각은 해 본 적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가끔 양주를 선물로 받게 되었고, 혼자서 마실 엄두는 나지 않아 매년 명절 때 고향에 갖다 드렸다. 아버지께선 때때로 혼자 양주를 즐기셨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별세하시고 난 후 집에 있는 양주들을 어떻게 처분할지 고민이 되었다. 한 번도 혼자 양주를 마셔 본 적이 없어 새 병을 따기가 망설여졌던 것이다. 그러다가 올해 초에 큰맘 먹고 한 병을 땄다. 발렌타인 마스터스였다. 17년도 아니고, 23년도 아닌 마스터스는 무엇인가 했더니, 한국인의 취향에 맞추어 여러 년도 것을 믹스한 것이라고 한다. 인터넷의 사람들 평은 괜찮았다.
기왕에 마시는 것, 맛있게 마셔보려고 양주를 어떻게 마시는 것이 좋을지 인터넷을 찾아보니 얼음이나 물을 섞지 말고 원액 그대로 상온에서 마시는 것이 좋다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향을 더 잘 느낄 수 있도록 입구가 약간 좁은 양주 전용잔을 쓸 것을 권장했다. 집에 그런 잔이 없는데 굳이 구입하기가 그래서 집에 있는 와인잔을 꺼냈다. 와인 마실 때처럼 살살 돌려가며 색깔도 감상하고 약간 디캔팅(?)을 시킨 후에 향을 코로 훅 들이켜 보았는데... 뚜둥...! 엄청난 알코올 향이 승천하는 용처럼 콧 속을 지나 정수리를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아... 그래서 별도의 양주잔이 필요한 것이구나... 하는 배움을 얻고, 남은 술은 평범한 유리컵으로 옮겨서 마셨다.
그 후로도 몇 차례 양주 원액을 그대로 마시는 시도를 해 보았는데, 너무 독해서 맛을 느끼기도 힘들고, 한 잔(30cc)만 마셔도 취해 버려서 내 취향이 아니구나 싶었다. 나는 취하는 것 자체보다는 마시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술의 맛과 향, 그리고 안주와의 마리아주, 그 시간의 여유로움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맥주나 와인을 마실 때 한 잔을 30분 이상 천천히 즐겨가며 마시는 편이다. 그런데 양주는 한 모금 마시는데 5분도 걸리지 않으니 그 과정의 즐거움을 느끼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다가 결국 안착한 것은 한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스타일인 언더락이었다. 얼음을 몇 개 잔에 담아놓고, 스트레이트 한 잔 정도만 부어서 얼음이 좀 녹았다 싶을 때부터 마시기 시작했더니 독하지 않고 괜찮았다. 한 잔을 20-30분 정도에 걸쳐서 조금씩 맛보아가며 마시는 것도 익숙해졌다. 천천히 음미하다 보니 발렌타인이란 술은 무척 근사했다. 깊이 있고 향긋한 오크향 속에 캐러멜처럼 달콤한 맛이 약간 섞여서 여타의 다른 술, 즉 기존에 마시던 맥주나 와인과는 다른 아주 깔끔하고 정결한, 순수한 느낌이 있었다. 얼음이 녹아감에 따라 술이 희석되어, 마치 저녁노을의 짙은 붉은빛이 차츰 어두운 밤의 푸른빛으로 변해 가는 듯한 오묘한 변화도 느껴졌다. 태양 같은 뜨거움은 사라지고 별빛 같은 맑은 차가움으로 변해간달까... 다 마실 때쯤 되면 약간 긴장도 풀리고 적당한 행복감도 들어서 문득 '이러다 중독되는 거 아냐?' 싶은 불안한 생각마저 들 때가 있었다. 맥주나 와인보다 알코올 도수가 높아서인지, 발렌타인이 생각나는 순간의 갈망감도 그 도수만큼이나 강렬했다. 이전에 맥주, 와인은 항상 주말 저녁에만 마시곤 했는데, 이 놈의 발렌타인은 자꾸 평일날 마시게 된다. 그래서 오늘(월요일)도 일이 많고 피곤했다는 핑계로 한 잔 마신 후에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끔 혼자 양주를 즐기셨던 모습을 생각하면, 나도 이제 그 여유와 행복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기쁘기도 하다. 그리고 내 외로운 인생길에 맥주, 와인이란 친구 말고 위스키라는 친구를 새로 사귀게 되어 기쁜 점도 있다. 가급적 이 친구와 평생 사이좋게 잘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앞으로 즐거운 시간 함께 보내되 너무 자주 만나지는 말자꾸나. Ch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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