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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서로의 등을 바라보며(정홍수)

by 바쁜하루 2026. 5. 5.

10년쯤 전이었나. 정홍수 작가의 '마음을 건다'를 우연히 읽었는데 그 느낌이 무척 좋았다. 평론가여서 그런지 문장의 깊이가 깊고 어휘도 풍부해서 글 읽는 즐거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에세이를 표방했음에도 대부분의 글들이 도서비평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 책들을 읽지 않은 사람으로서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며칠 전 리디북스에 읽을 게 없나 뒤적거리다가 작가명으로 검색해 보니 새로운 에세이집이 있길래 냉큼 사서 읽었다. 

감상은 이전 에세이집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장이 단단하면서도 아름다웠고, 그 속에 담긴 진심어린 사유와 행간에 비치는 겸손한 성정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내 취향이었다.

아쉬운 점도 역시 비슷했다. 에세이집이라면 자신의 신변잡기적인 얘기가 주가 될 법도 한데, 정홍수 작가는 거의 9할의 분량을 도서비평과 영화비평에 할애했다. 물론 각 이야기의 끝에 사적인 감상이 몇 문장 더해져 있었기에 엄밀한 의미의 비평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내게는 뭐랄까, 에스프레소 같은 쓴 맛이었다. 달달한 프라푸치노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드러운 까페라떼 정도만 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난 원래 아메리카노 파(派)인지라 그 쓰디쓴 맛을 혀끝으로 묽혀가며 한 권을 그럭저럭 음미하고 삼켰다. 짙은 커피 향이 사라지기 전에, 읽으며 밑줄 친 몇몇 부분들을 기록 삼아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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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궤도가 툭툭 끊어지고, 뭉턱뭉턱 돌아보고 싶지 않은 시간의 공동(空洞)이 생겨버릴 때 사람들은 행복의 느낌을 가질 수 없다. 내 경우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80년대가 그러했다. 사실 이상의 심리적 과장이 많이 개입했겠지만, 그 시절 곳곳은 꼭 불에 덴 흉터처럼 남았고 어느 날 고개를 들어보니 이제 할 일은 이 도시에서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무언가가 사라졌다. 그러면서 삶을 돌아보는 게 너무 쓰라린 일이 되어버렸다. 그 와중에도 과거로부터 흘러온 시간은 나에게 머물렀다 쌓이고 다시 어떻게든 흘러가고 있었겠지만, 마음은 그 흐름에서 너무 멀어져 있었고, 삶은 서걱대는 모래알처럼 되어 있었다. 

가끔 그 시절 도서관에서 나와 걷던 교정의 밤길이 생각난다. 온통 갈구하는 마음 같은 것. 거기 그 책들에 답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조금씩 채워지고, 형성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는 있었던 것 같다. 마음은 한없이 가난했지만 남루하진 않았다. 인간을 깊이 알고 싶었고 세상의 이치에 가닿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게 그때 읽었던 구절구절들은 종이 위로 꾹 눌러진 납활자처럼 마음에 각인되었던 것 같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물론 지금 나는 그 구절들의 행방을 모르고, 자취를 모른다. 언젠가부터 책은, 문학은 생활의 건조한 필요 안으로 들어와버렸고 막막하고 절박한 질문 같은 것은 사라져버렸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 내가 문학에 투사했던 것은 어떤 시대에 만들어진 '문학'이라는 관념이었을 테고, 그 관념의 실질은 약간의 인문적 교양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립다. 그렇게 밤을 새워 책을 읽고 부옇게  밝아오던 새벽을 맞던 시간이. 문학의 가난과 마음의 가난이 서로를 애타게 찾던 시간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마지막 대목이었던가. 우리가 이곳에서 아름답고 선량한 감정으로 한 시절을 보냈던 걸 잊지 말자고 했던게. 

왜 고단하고 외롭지 않으랴. 그러나 아침저녁으로 마주하는 모자의 간소한 식탁에는 설명하기 힘든 온기가 있다. 이것은 삶의 동화적 포착과는 무관하다. 살아간다는 일의 소중함과 느꺼움 앞에서 감독의 시선은 겸허하기만 하다. 장 할머니가 사위와 손자를 만나러 가는 길에(딸은 손자를 남기고 세상을 떴고 사위는 재혼을 했다) 정여사가 동행하는데, 이 여정이 보여주는 가슴 아픈, 그러나 참으로 깊고 따스한 두 여성의 연대의 풍경에 대해서는 말을 아껴야 하리라. 그래, 삶은 언제든 개념화한 가난이나 사회학적 불행보다 더 크다.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여기에는 먼 훗날 필름의 발굴과 같은 목표 지점은 당연히 없다. 캐내야 할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범용한 삶의 시간들. 그러면서 그것들은 더 많은 우연, 의지와 노력의 개입, 시간의 무심한 흐름과 함께 역사가 된다. 기억할 만한 의미의 층도 생겨난다. 대개는 한참 나중의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착잡한 이야기만은 아닐 테다. 우리가 사는 오늘이 많은 부분 역사의 표층에서 흩어지는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은 동시에 역사에 대한 무성無聲과 익명의 무수한 참여를 잊지 않는 일이기도 하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