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뽐뿌 벗어나기

내가 첫 카메라를 구입한 것은 2000년대 초반, '디카'라는 물건이 처음 국내에 유행할 무렵이었다. 미놀타 F100이란 모델이었는데, 구입해서 몇 년 간 나름 즐겁게 가지고 놀았다. 고작 200만 화소급이었지만, 그래도 데이트할 때 여자 친구 사진도 찍어주고, 친구들과 함께 출사 여행도 가곤 했었다. 당시 친구들이 들고 왔던 카메라는 니콘 쿨픽스 2500(일명 쿨이오), 캐논 파워샷 뭐 이런 종류였다. 초창기의 기계적 한계가 있다 보니 야간 사진은 형편없이 흔들리고 확대하면 노이즈도 심해 현상은 어려웠다. 그래도 직접 찍은 사진을 싸이월드에 올려놓고 혼자 바라보며 뿌듯해했었고, 가방 속에 F100을 항상 넣어 다니다가 틈만 나면 꺼내어 이것저것 찍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나의 젊은 시절을 함께 한 F100이 어느 날 갑자기 운명한 후 몇 년은 카메라 없이 지냈는데, 2009년 문득 뽐뿌가 올라 캐논 IXUS 110이란 모델을 구입했다. 어디 여행 가기 전에 구입했던 것 같은데 막상 그걸로 찍은 사진은 별로 없다. 그 이유는 여자 친구(지금의 아내)가 디카로 찍으면 (일회용 카메라에 비해) 얼굴의 잡티가 도드라지고 얼굴이 볼록하게 나와서 안 예쁘다며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멀쩡한 디카는 가방에 넣어두고 일회용 카메라를 사서 그걸로 사진을 찍었다. ㅠㅠ DSLR이 한창 유행하던 시기여서 기변을 고려했을 법도 하지만, 워낙에 무거운 것을 들기 싫어하는 스스로의 성격을 잘 알기에 일찌감치 포기했다. 게다가 그 무렵부터 아이폰을 사용하게 되면서 DSLR은 커녕 똑딱이마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10년 정도를 아이폰에 만족하며 잘 지내왔는데, 몇 년 전 아기가 태어날 무렵부터 다시 슬금슬금 카메라에 대한 뽐뿌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기가 커가는 모습을 보다 예쁘게 담으려면 폰카보다는 좋은 화질이 필요하다는 당위성(!)과 최근 대세라 할 수 있는 미러리스는 DSLR보다 가볍고 휴대성이 좋다는 합리성, 그리고 발매 후 1, 2년만 흐르면 가격도 저렴(?)해져서 큰 출혈 없이 감당할만하다는 현실성까지 가세해 내 마음에 뽐뿌의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아내의 날카로운 지적, "오빠는 사고 나서 한 달도 안돼서 금세 싫증 낼 거야. 집에 바둑판이랑 기타랑 오디오 봐봐. 거의 쓰지도 않고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잖아", 에 폭풍우는 금세 수그러들곤 했지만, 그러다 몇 주가 지나면 나도 모르게 검색창에서 최신 카메라 가격을 알아보고 있었다. 구입하기 전까지는 결코 낫지 않는다는 불치병, 지름신... 하지만, 카메라를 사기 전까지 이렇게 열중하다가도, 막상 구입하고 나면 아내 말처럼 사용하지 않고 구석에 처박아둘 것 같은, 불길하면서도 확신에 가까운 예감을 떨칠 수 없어 아이가 5살이 되도록 아직까지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 하... 이놈의 선택불능장애.
과연 내 소비욕이 합리적인 것인지, 아니면 무료함과 우울함을 탈출하기 위해, 구매와 동시에 닫혀 버리고 말 비상구를 찾는 것인지 나 스스로도 알 수가 없다. 생각해 보면 내가 좋아하는 혹은 내가 찍고 싶은 사진들은 깨끗하게 정리된 책상 모습이나 단아하고 밝은 거실 모습, 색감이 아름다운 거리 풍경, 한적하고 인적이 드문 길, 넓고 푸른 바다와 하늘... 다시 말해 여유롭고, 조용하고, 사람이 없는 공간들이다. 어쩌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아웃포커싱이 잘되는 카메라가 아니라 사진 속에 담긴 정돈되고 평온하고 아름다운 일상은 아닌지... 내가 갖고 싶은 건 카메라도, 사진도 아닌, 사진 속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후 어제 사무실의 책상 청소를 했다. 픽사베이나 펙셀 사이트에서 검색한 사진 속 모습처럼 책상이 조금 단정해 보였다. 그러고 나니 카메라를 사고 싶은 욕구가 정말 5% 정도 줄어들긴 했는데, 이게 정말 제대로 효과가 있는지 확인하려면 집안 대청소를 해 봐야 될 것 같다. 집안 대청소 후에도 카메라 뽐뿌가 계속 남아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적어 보도록 하겠다.
다만, 우리 집은 대청소를 1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하다는 점, 그리고 집안 대청소로도 해결이 안 되면 우리 동네 거리, 그래도 안되면 출퇴근 도로 주변까지 깔끔하게 청소해야 뽐뿌를 걷어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은 걱정도 든다는 점을 미리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그때쯤이면 카메라가 아닌, 청소도구에 뽐뿌가 올지도 모를 일이다. 진공청소기는 다이슨이 좋다던데... 아니, LG가 나으려나? ... 그래도 역시 삼성이... 아냐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