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의 시대(박노자)
박노자. 2018. 전환의 시대. 한겨레출판.
완독일: 2020. 7. 12.
'거꾸로 읽는 고대사',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등의 책을 통해 박노자 교수님의 날카로운 비판 정신에 감동받은 적이 있어 이번에 구입해 읽게 되었다. 사회비판 서적이다 보니 조금 지루하지 않을까 염려했으나, 워낙에 달필이셔서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총 54편 칼럼 한 편 한 편이 모두 내 정신에 좋은 약이 되는 느낌이었다. 평소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은 구절에 밑줄을 치는 습관이 있는데,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밑줄 친 부분을 확인해 보니 A4 용지로 10매는 족히 되어 보였다! 그러다 보니 인상 깊은 내용을 하나만 꼽기가 무척 어려웠지만, 가장 공감이 가는 지적은 ‘대한민국은 병영 사회이고, 곳곳에 스며든 군대 문화가 대한민국을 병들게 만드는 첫째 요인’이라는 부분이었다.
(어린이들이 해병대 체험과 같은) 이런 캠프에서 배울 수 있는 ‘인생철학’은 과연 어떤 것인가? 군대는 가장 효율적인 조직이다, 윗사람의 명령을 가장 정확하게 가장 빨리 수행한 사람은 성공하고 그러지 못한 사람은 낙오된다, 복종과 자기통제는 살길이고 항명은 반역이다 운운하는 처세가 아닌가.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안보보다 탈군사화가 국정의 핵심과제로 부상해야 한다. 탈군사화를 이루자면 한국 사회는 먼저 몇 가지를 이해해야 한다. 군복 입고 해병대 훈련을 받는 초등학교 꼬마들은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볼 수 있다는 점, 상명하복하는 위계질서의 내면화는 개인과 사회를 황폐화시킨다는 점, 그리고 대한민국이 미군 무기상들에게 건네는 돈의 절반이라도 남북 경제협력에 썼다면 우리는 이미 남북 평화공존의 시대에 진입했을 것이라는 점 등을 인지해야 한다.
저출산-고령화 문제에 대한 지적도 날카롭다.
그런가 하면 ‘저출산-고령화 문제’란 말을 한번 보자. 저출산-고령화란 산업사회 발달에 따른 자연발생적 측면도 있지만, 분명히 한국 국가-자본이 추진한 일련의 정책들의 결과이기도 하다. 피고용자 거의 절반이 비정규직이고, 전체 가구의 절반 가까이가 월세나 전세로 남의 집을 빌려 사는 무주택자 신세고, 사교육비 등을 포함한 양육비가 천문학적인 숫자로 솟아오르니, 결국 현대판 절대-상대 빈곤이 저출산을 가져오는 것이 당연하다. 게다가 국가의 이민 정책은 초강경이고 노동이민도 단기취업 위주로만 받아들이는 게 정책의 기조다보니 구미권과 달리 이민을 통해서 고령화를 완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닌 셈이다. 결과적으로 문제는 한국형 자본주의의 구조적 빈곤과 이민통제책인데 이걸 ‘저출산’ 문제로 돌리면서 은근히 출산을 주저하는 여성들을 비난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야비하기만 하다.
아래는 부동산 문제에 대한 지적.
최고 부자 1%가 사유지의 57% 정도를 소유하고, 최고 부자 5%가 사유지 83% 정도를 소유하는 ‘현대판 대지주’ 사회다.
영세사업자 같은 경우에는 소득의 절반 이상이 고스란히 건물주의 주머니로 들어가기에 정말 병작하는 소작인 신세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1가구 2주택 이상을 보유한 경우 잉여주택들을 국가가 공정가로 의무적으로 매입하여 무주택 가구들에게 장기할부 방식 내지─빈곤층의 경우─무료로 공급해준다든가 하는 재분배 전략을 내세우는 일은 보기가 힘들다.
그리고 재벌 공화국 대한민국에 대한 비판도 새겨둘 만하다.
이념 문제를 떠나서 일단 이 나라가 살아남으려면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다들 골고루 살기 편한 사회”로 개조해야 한다. 우선 교육과 의료, 주거 등 생존과 재생산에 가장 긴요한 부분들을 ‘시장’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단순한 진리부터 일반화되었으면 한다.
매출액 기준 국내 1, 2위 기업인 삼성전자와 현대차의 매출액을 합치면 한국 GDP의 20%에 육박한다. 10대 재벌의 전체 매출은 한국 GDP의 80%를 넘는다. 혼맥 등으로 얽힌 가문들이 지배하는 몇 개 대기업이 한 나라의 경제를 이처럼 독점하고 있다면, 과연 그 나라의 사회와 정치가 재벌들의 통제를 면할 수 있겠는가?
근래 구입한 책 중에 책값이 아깝지 않은 책 No. 1이었다. 열 권쯤 사서 친한 친구들에게 한 권씩 선물하고 싶다. 그리고, 국회의원님들은 세비로 사서 꼭 읽어보시길 당부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