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성과 힘. 2000.
완독일: 2020. 5. 7.
이 책은 조세희 작가가 1975년 12월 문학사상에 발표한 "칼날"부터 1978년 여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까지 총 12편의 연작 단편소설들을 모아 발간한 것이다. 각 단편들은 서로 다른 화자에 의해 독립적인 스토리로 진행되지만, 전체 12편은 마치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는 신체 기관처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70년대 엄혹한 군부독재 시절, 난장이와 그의 세 자녀(영수, 영호, 영희)들이 기득권자들에게 경제적 착취 뿐만 아니라, 인간의 기본권과 존엄성의 박탈까지 당하며 고통받는 현실을 너무도 생생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대학 신입생 때였나? 누군가(아마도 학생운동하는 선배였겠지)가 이 책을 권해주어 처음 읽게 되었는데, 나는 12편이 연결되어 있는 구조인줄 모르고 표지 제목과 동일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채터만 읽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무척 지루하고, 재미없고, 어렵게 느꼈던 기억이 난다. 대학에 들어와 맛보았던 소주와도 같은 느낌. 매우 쓰고, 목에 자꾸 걸리고, 구역질이 났다. 그래서 나머지 11편은 읽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덮어버렸다. 고교생이란 알을 갓 깨고 나와 혼란스럽던 시절... 그땐 그랬다.
93년 봄, 3당 합당에 의해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되었고, 최초의 문민정부 기치 아래 전두환, 노태우에게 실형을 내리고, 금융실명제를 비롯한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던 시절이었다. 군부독재 타도라는 명백한 활동근거가 사라져 버린 까닭에 대학에서 운동권은 학생들의 지지를 잃고 빠르게 축소되고 있었다. 그래도 그 때까지 신입생들이 선배들과 함께 각종 '불온서적(변증법적 유물론, 한국현대사 등)'을 탐독하며 '의식화'를 하는 전통이 남아있었고, 우리도 그 끝물을 조금 맛보았다. 뿐만 아니라 당시 선배들 중에는 노동운동에 헌신하겠다며 대학을 자퇴하고 공장에 들어간 사람도 있었고, 학생운동을 하러 시위에 나갔다가 최루탄에 맞거나 곤봉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도 종종 있었다.
그 해 봄 어느 날 공강 시간에 빈둥거리고 있을 때, 선배들이 같이 가자고 해서 무작정 따라간 곳은 철거민들이 농성을 하는 어떤 건물이었다. 십여 명 가량의 사람들이 구석 복도에 라면 박스를 바닥에 깔고 그 곳을 집 삼아 먹고 자며 지내고 있었다. 어두침침한 건물에, 바닥이 매우 차가워서 오래 앉아 있기가 힘들었는데, 선배들 눈치를 보느라 집에도 못가고 늦게까지 함께 있었다. 철거민들은 씻지 못해 모두 꾀죄죄했고, 가스버너에 저녁을 해 먹었다. 우리도 함께 먹었다(생각해 보니 쌀만 축낸 것 같다). 그들 중 일부는 반주로 소주를 마셔 얼굴이 불콰해졌고, 우리에게도 소주를 권했는데, 소주를 싫어하는 우리는 눈치만 보았고, 그러자 선배 중 하나가 잔을 들어 분위기를 맞추었다. 춥고, 바닥이 너무 차가웠고, 나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은 느낌에, 또 왜 여기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갑갑한 심정이 되어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그렇게 밤 늦게까지 있다가 후배들은 돌아오고, 선배들은 거기 남아 하루 잤던 것 같다. 선배들이 억지로 함께 있자고 안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집으로 왔다. 내 머릿 속에서 그 기억은 줄곧 "괜히 생고생했네" 폴더에 30년 가까이 저장되어 있었다.
얼마 전 책꽂이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27년 전 봄, 선배가 권해주었던 이 책을 지금에야 다 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12편의 연작을 내리 읽었는데, 책은 더 이상 어렵지 않았다. 삼키기에 그리 쓰지도 않았다. 그저 매우 슬프고,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 시절 작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쌓여 있던 절망과 분노의 크기가 그토록 거대한 것에 놀랐다. 아마 그 큰 절망과 분노가 원동력이 되어 이 대한민국 사회를 끌어 움직이고, 87년이란 산을 넘고, 2016년이란 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올 수 있었구나 싶었다. 책을 덮은 후, 93년 봄 철거민 농성장의 기억은 내 머릿 속에서 "좋은 약은 입에 쓰다" 폴더로 옮겼다.
실은, 매우 아름다운 소설이다. 분노에 차 욕설을 하며 식칼로 자해를 하는 한 여성과도 같은 글인데, 진정제 주사를 맞고 깊은 잠에 빠져든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예쁜 문체와 균형잡힌 플롯, 시크한 크로스오버가 무척 관능적이고 매력적이다. 한국 현대문학에서 이만큼 진정성 있고 아름다운 소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우리 모두에게 큰 행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