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한강)
한강. "채식주의자". 창비. 2007.
완독일: 2017. 6. 30.
2016년 맨부커상에 빛나는 채식주의자를 드디어 읽어보았다.
문장이 정연하고, 작가의 여린 감수성이 아름다웠다. 식물이라는 피동적 생명체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감정이입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는 과연 평소에 식물을 생명체로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아마도 밥상 위의 반찬 중 한가지로만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세 편의 단편연작들 속에서 등장인물들(영혜, 희주 남편, 희주)은 화자를 바꾸어 가며 상황을 이끌어 나간다.
내 느낌에는 채식주의자와 몽고반점이 전반전과 후반전 정도의 독립적인 스토리라면 나무불꽃은 연장전 격의, 말하자면 분량이 긴 에필로그 같았다.
지금은 책을 읽은지 1달 정도 지났는데, 다른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영혜의 처절한 고통의 감정만이 지금도 느껴진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을 가진 자의 슬픔이라고 할까. 제일 마지막에 새를 물어뜯는 장면은 인상적이긴 했으나 설정이 다소 작위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우리나라 신춘문예 등단 작가들의 독특한 표현기법이라고나 할까. 갑자기 우주공간에서 뻥하고 나타나는 것처럼 황당한 만화적 설정. 어쨌거나 이 장면이 주인공이 느끼는 극도의 혼란과 분노, 그리고 새로 상징되는 자유로운 영혼의 죽음(혹은 타살)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장면이란 생각은 들었지만 난 이런 비현실적인 결말보다는 차라리 현실적인 결말이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몽고반점은 페이지는 잘 넘어갔지만 작품의 주제가 무엇인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원초적 본능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은 근친상간 금기와 같은 인간의 사회적 가치보다 높은 영역의 것이다. 뭐 이런 거? 나로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주제였다.
나무불꽃은 읽는 내내 힘들었다. 주인공 희주의 번민과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졌을 뿐만 아니라, 주인공(혹은 작가의) 삶이 대한 태도가 너무나 음울하고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억에 남는 문장
"맑은 날에 수많은 가지들을 펼치고 햇빛을 반사하던 저 나무는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같았는데, 비에 잠긴 오늘은 할말을 안으로 감춘 과묵한 사람 같다. 늙은 밑동의 껍질은 흠뻑 젖어 저녁처럼 어둡고, 잔가지의 잎사귀들은 말없이 떨며 비를 받아들이고 있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
그 질문에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옳았을까. 그걸 대체 말이라고 하느냐고, 온힘을 다해 화라도 냈어야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