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30년 만에 천장지구를 보다

바쁜하루 2021. 1. 8. 12:36

30년 전, 내 중고등학교 시절엔 홍콩영화가 극장가를 점령하고 있었다. 7, 80년대 이소룡과 성룡의 쿵후영화 시대는 막을 내리고, 주윤발, 유덕화를 필두로 하는 일명 홍콩 누아르의 전성시대. 갱들의 암투와 도박을 영웅적으로 묘사한 영화들의 영향으로 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교실에서 슬로 모션으로 총격전 흉내를 내었고, 방과 후엔 친구 집에 모여 포커판을 벌이곤 했다. 나도 그 당시에 나온 웬만한 영화들, 말하자면 영웅본색 시리즈와 첩혈쌍웅, 지존무상, 천녀유혼은 그 무렵 섭렵했는데, 천장지구는 보지를 못했다. 개봉 당시에는 인기가 없었고 뒤늦게 비디오로 인기를 끌었던 작품인지라, 이미 그때는 대학 수험준비로 바빠 챙겨 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가끔 영화 칼럼에서 유덕화에 관한 내용이 나오거나, 혹은 정우성에 대해 언급이 나올 때('비트'의 원조격인 영화라 그런 듯) 단골로 등장하는 영화가 천장지구인데, 그때마다 '언제 비디오 빌려서 한 번 봐야지' 하면서도 막상 비디오 가게 가면 잊어버리고 다른 걸 빌려오고... 그러다가 30년이나 세월이 지났다. ㅠㅠ


그러던 차 며칠 전 넷플릭스에서 이 영화를 발견하곤 '오호라. 이번엔 한 번 봐야겠다'하며 시청을 시작했다. 고등학생 때 받은 연서(戀書)를 중년이 되어서야 꺼내 읽는 심정이랄까. 약간은 흥분되고 설레면서도, 세월이 흘러 함께 나눌 사람이 없음에 조금은 아쉽고 서먹한...
아화(유덕화)는 폭력조직의 똘마니다. 어느날, 조직원들이 은행을 털 때 차량으로 그들의 탈출을 돕는 역할을 맡는데, 그 과정에서 죠죠(오천련)를 인질로 삼아 경찰의 추격을 따돌린다. 다른 조직원들은 범행이 탄로 날 수 있으니 죠죠를 즉각 죽이자고 했으나, 아화는 자신이 직접 해결할 테니 죠죠에게 손대지 말라고 한다. 그 후 아화는 아무 조건 없이 죠죠를 안전하게 집으로 돌려보내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배신자라는 오명과 함께 반복적인 살해 위협을 받는다. 한편 죠죠는 불행한 환경 속에 잡초처럼 살아가는 (잘생긴) 아화에게 연정을 느끼게 되고, 아화는 처음엔 그녀를 귀찮게 여기지만 차츰 그녀의 순수함과 진심에 감동하여 둘은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그 이후 여러 유명한 씬들이 나오는데 둘의 조촐한 생일파티와 케이크 얼굴에 던지기, 과자를 손끝에 올리고 손목을 탁 쳐서 입에 넣는 장면, 웨딩드레스를 입은 죠죠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밤거리를 질주하는 장면 등이 이어진다.
역시나, 나이가 든 탓일테지만, 이런 아름다운 장면들을 보면서도 자꾸 곁가지로 생각이 빠지는 걸 막기가 힘들었다. 열일곱 살의 나였다면 틀림없이 사랑에 빠졌을 오천련이지만, 지금은 안드로젠이 낮아진 탓인지 '왜 이리 평범한 애를 주연으로 뽑았지'하는 시니컬한 생각이 먼저 떠올랐고, 아화에 대해서도 '그래 봐야 그냥 잘생긴 조폭이잖아', '죠죠 엄마 아빠는 하늘이 무너지겠는걸...' 하는 꼰대 마인드가 귓전에서 자꾸 떠드는 바람에 영화에 푹 빠져들기가 쉽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천장지구(天長地久)라는 제목이었다. 홍콩판의 원제는 천약유정(天若有情: 하늘에 만약 정이 있다면)인데, 한국판은 어떤 연유에선지 천장지구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조금 검색해 보니 천장지구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에서 인용한 것으로 장한가는 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인 사랑을 기리기 위한 시이다. (장한가 전문: namu.wiki/w/%EC%9E%A5%ED%95%9C%EA%B0%80) 인용된 천장지구는 가장 마지막 2행에 나오는데
天長地久有時盡 천장지구유시진
하늘 땅이 장구해도 끝이 있건만,
此恨綿綿無絶期 차한면면무절기
이 한은 끝없이 이어져 다함이 없네
이 대목이다.
궁금함이 생겨 양귀비 일화를 찾아보았는데 의외로 너무 재미있었다. 당 현종은 원래 그 이름이 말해주듯이 현명한 정치를 펼쳐 성군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던 중 56세에 아내가 세상을 뜨자 후처를 물색하던 차에 온천 궁에 행행하였다가 당시 22세이던 양귀비를 보고 홀딱 반해 그녀와 잠자리를 한다. 그러나 양귀비는 당시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 이모의 부인이었기에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범한 엽기적인 상황. 그 후 양귀비는 집을 나와 종교인(도교의 사제)이 되고, 현종의 명으로 궁에 입궐한 후 연인 관계를 유지하다가, 결국 27세 때에 정식 귀비로 책정된다. 현종은 양귀비에 빠져 국사를 게을리하게 되어 외척들이 득세하고 국운이 기우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결국 안녹산이 양귀비의 친척 오빠인 양국충과의 반목으로 반란을 일으키자(안사의 난) 현종과 양귀비는 장안을 떠나 서촉으로 피난길에 오른다. 피난 도중 군사들이 반란의 원인이 된 양국충과 양귀비를 처형하지 않으면 더 이상 현종을 따르지 않겠다며 죽임을 강요하자 현종은 양국충을 처형하고, 양귀비는 스스로 목을 맨다. 향년 37세.

중국 황제의 별장인 ‘당화청궁(唐華淸宮)’에 걸린 양귀비의 초상화


이런 비극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백거이가 쓴 장한가에는 그 뒤의 스토리가 상상으로 이어진다. 현종이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 뒤 양귀비를 너무 그리워하며 슬퍼하자 한 도사가 그녀의 혼백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에 따라 방사를 백방으로 풀어서 수소문 끝에 선녀로 화해 살고 있는 그녀를 찾아내게 되고, 방사는 그녀에게 현종의 마음을 전한다. 그녀 또한 깊은 그리움을 담은 선물(자개장과 비녀 반쪽)을 현종에게 전하는데, 이 대목에서 비익조(암수가 눈과 날개가 각 하나씩이라, 암수가 몸을 서로 의지해야만 하늘을 날고 생활할 수 있는 새)와 연리지(서로 다른 나무의 가지가 맞닿다가 엉켜 하나로 합쳐진 것)라는 유명한 사랑의 상징들도 등장한다.
臨別殷勤重寄詞 임별은근중기사
헤어질 즈음 간곡히 다시 하는 말이
詞中有誓兩心知 사중유서량심지
두 마음만이 아는 맹세의 말 있었으니
七月七日長生殿 칠월칠일장생전
칠월 칠석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 야반무인사어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약속.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서 만난다면 비익조가 되기를 원했고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련리지
땅에서 만난다면 연리지가 되기를 바랐지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두 행이 바로 천장지구...
天長地久有時盡 천장지구유시진
하늘 땅이 장구해도 끝이 있건만,
此恨綿綿無絶期 차한면면무절기
이 한은 끝없이 이어져 다함이 없네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은 길고(天長) 땅은 오래다(地久). 즉, 우주의 시공간은 무한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그보다도 길고 영원하리.

이젠 정말 나이가 든 건가...
영화의 감동보다 천장지구라는 제목에 담긴 여운이 더 크게 느껴진다.